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찰스 3세가 영국 왕실 이미지 개선을 위한 변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조용한 권위’를 통해 리더십을 보여온 여왕과 달리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내고, 자신은 물론 왕실 구성원들이 국민과 만나는 횟수를 크게 늘려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영국 국민에게 “왕실이 달라졌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여왕 서거 이후 위기에 처한 왕실의 인기를 되살리고,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찰스 3세는 25일(현지 시각) 즉위 후 첫 성탄절 영상 메시지를 통해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보였다. 그는 촬영 장소부터 차별화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주로 윈저성이나 버킹엄궁의 자기 방에 앉아 연설했던 것과 달리 찰스 3세는 어머니가 묻힌 윈저성 내 성 조지 예배당에 서서 메시지를 녹화했다. 그는 “여기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잠들어 있는 곳에서 무척 가까운 곳”이라며, 자신이 영국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았던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공의 뒤를 이은 사람임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메시지 내용과 형식 역시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변했다. 여왕은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을 피하려 “우리는 힘든 한 해를 보냈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표현을 주로 썼다. 찰스 3세는 이와 달리 “불안과 고난의 시기에 많은 영국인이 자신의 가족을 입히고 먹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 간호사와 구급대원, 교사 등 공공 서비스 종사자들을 직접 지목하며 “이들의 헌신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이라고 말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국왕의 발언은 연말 파업으로 정부·국민과 갈등 중인 공공 노조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전쟁과 굶주림, 자연재해, 생활고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언급하며 기부와 봉사에 나선 이들의 희생 정신을 칭송했다.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며 영국 국민이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돌아볼 것도 촉구했다. 더불어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웨일스의 자선 행사에 참여하는 영상을 공개, 왕실이 국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드러냈다. 왕세자 부부는 최근 외부 행사에서 시민들을 만나면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는 등, 부쩍 친근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찰스 3세 역시 지난달 10일과 이달 6일 두 차례나 ‘달걀 공격’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공개 행사를 이어가는 중이다.
반면 아내 메건에 대한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키며 왕실을 떠난 해리 왕자,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앤드루 왕자 등 왕실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만한 인물의 모습은 사라졌다. 찰스 3세는 성탄절 메시지에서 해리와 앤드루 왕자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왕실은 최근 버킹엄궁에서 두 왕자의 개인 공간 및 사무실을 완전히 없앤 것으로 알려졌다. 해리 왕자와 왕실 간 갈등은 일촉즉발 상황으로 고조되는 중이다. 그는 지난 8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해리&메건’에서 “왕실에 (인종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이 있다”고 비난했다. 또 다음 달 출간 예정인 회고록 ’스페어(Spare)’를 통해 추가 폭로를 이어갈 전망이다.
찰스 3세는 왕실에 인종적 편견이 있다는 지적을 의식한 듯, 다문화 포용에도 적극 나섰다. 즉위 100일째인 지난 16일엔 런던의 유대인 센터를 찾아 유대 명절 ‘하누카’ 행사에 참석했다. 취임 인사를 하러 버킹엄궁을 찾은 리시 수낙 총리에겐 힌두교 명절 ‘디왈리’에 먹는 간식을 내놨다. 지난달 여왕의 최측근이자 윌리엄 왕세자의 대모인 수전 허시가 아프리카계 여성의 출신지를 따져 물어 인종차별 논란이 일자 그를 즉시 파면하기도 했다.
영국 언론은 일단 찰스 3세와 영국 왕실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데일리메일은 “국왕은 자신의 공적 의무를 모범적으로 행하고 있다”며 “인간적 연민이 있고, 때로는 정치가 같기도 하다”고 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그러나 “찰스 3세는 선대 여왕만큼의 매력이나 권위가 없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또 “해리 왕자의 회고록이 나오기 전까지 왕은 ‘품위 있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며 조만간 왕실을 둘러싼 본격적 논란이 시작될 것임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