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현지 시각)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히잡 의문사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 참가자들이 마흐사 아미니의 생전 모습과 이란 국기를 합성한 사진 등을 들고 이란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국가대표 경기에서 총 109골을 넣은 이란의 축구 영웅 알리 다에이(53)의 부인과 딸은 26일(현지 시각) 남편을 만나러 가려고 테헤란에서 아랍에미리트(UAE)행 여객기를 탔다. 1000㎞ 정도를 날아 목적지인 두바이를 약 200㎞ 앞둔 상황에서 비행기가 돌연 페르시아만에 있는 이란의 키시섬에 착륙했다. 외신에 따르면 비행기의 갑작스러운 착륙은 다에이 부인과 딸을 내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 당국은 두 사람의 UAE행을 뒤늦게 알고 비행기를 강제 착륙시킨 것이다. 두 사람은 이날 테헤란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인권단체들은 “유명 인사들의 잇따른 반정부 시위 지지에 위기감을 느낀 이란 정부가 다에이 가족을 인질로 잡아 본보기를 보이려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에이는 그간 이란의 반정부 시위를 공개 지지해왔다.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이날 100일째를 맞았다. 시위는 지난 9월 14일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뒤 사흘 만에 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흐사 아미니(22)의 의문사가 발단이 됐다. 이번 시위는 1979년 호메이니의 반(反)왕정 이슬람 혁명이 세운 신정(神政) 체제 등장 이후 가장 긴 시위이자, 정권 최대 위기로 발전했다. 영국 BBC 등 외신은 “이란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과거에도 수차례 있었지만, 이번 시위는 여러 면에서 이전 시위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우선 이번 시위는 서민부터 엘리트까지 전 계층이 나섰다. 초기에는 아미니의 고향인 쿠르디스탄주(州)의 쿠르드족 사이에 시작됐으나, 곧 테헤란 등 대도시 여성들이 대거 동참했다. 이후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지식인들을 통해 조직화하면서 , 억압적 독재에 불만을 품어온 시민 전체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유명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란 정부는 수만명의 팔로워를 지닌 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시위 참여자도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1400만명의 팔로워를 지닌 유명 축구 선수 출신 알리 카리미는 이란 정권의 폭력적 시위 진압을 연일 비판하다 상해 협박을 받은 끝에 미국으로 피신했다. 여배우 타라네 알리두스티(38)는 히잡을 벗고 ‘여성, 삶, 자유’라는 시위 구호를 든 사진을 올렸고, 축구 선수 아미르 나스르-아자다니(26)는 반정부 시위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두 사람은 현재 이란 당국에 체포돼 정치범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나스르-아자다니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여성과 1990년대생 청년층(Z세대)이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도 특징이다. BBC는 “이들은 쓰고 있던 히잡을 보란듯이 불태우는 등 새로운 시위 경향을 만들어내며 엄격한 종교적 통치에 저항하고 있다”며 “시위대 사이에선 이슬람 성직자가 쓴 터번을 벗기고 도망가는 ‘터번 벗기기’도 유행 중”이라고 했다. 터번을 기득권과 억압, 특권의 상징으로 보고, 체제에 저항하는 의미라고 한다. BBC는 “시위대가 이슬람 민병대 기지, 이슬람 성직자 학교 등을 겨냥해 화염병 공격을 하는 등 과격화한 것도 크게 달라진 점”이라며 “해외 거주 이란인들을 중심으로 한 지지 시위도 산발적으로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의 인권운동가통신(HRANA)에 따르면 현재까지 반정부 시위로 구금된 사람은 1만8000명이 넘는다. 시위 도중 숨진 사람은 507명으로 이 중 69명이 미성년자로 파악되고 있다. 시위 진압 도중 숨진 군경도 66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시위 가담자 2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집행됐다. 처형이 예정된 사람도 최소 26명에 달한다. 이란 정부는 시위 조직화에 가담했거나, 정부 비판에 나선 기자와 변호사, 예술가 등 수십~수백명의 출국을 금지했다. 또 반정부 시위의 배후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세력이 있다며 지난 25일 영국 국적의 이란인 7명을 체포하는 등 지금까지 총 50여명의 외국인을 시위 연루 혐의로 체포·구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