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야당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 개혁 법안을 저지하려 내놓은 내각 불신임안이 20일(현지시각) 부결됐다. 이에 따라 현재 62세인 정년을 64세로 2년 늦추는 것을 골자로 한 연금 개혁 법안은 의회를 넘어서 본격 입법 절차를 밟게 됐다. 그러나 당초 예상보다 적은 9표차로 간신히 불신임안이 부결되면서, 마크롱 대통령의 향후 정국 운영은 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프랑스 하원은 이날 오후 6시부터 좌파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뉘프)과 중도 자유·무소속·해외영토(LIOT) 그룹이 공동 발의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내각 불신임안, 또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RN)이 별도 발의한 같은 내용의 불신임안을 차례로 표결했다. 그 결과 첫 번째 불신임안은 과반에 9표 부족한 찬성 278표로, 두 번째 불신임안은 찬성 94표로 부결됐다. 불신임안이 통과되려면 재적 의원 수 573명의 과반인 287표가 필요하다.
이번 불신임안은 프랑스 정부가 지난 16일 헌법상의 특별 규정을 이용해 의회(하원) 표결을 건너뛰고 연금 개혁법을 입법키로 한 데 따른 것이다. 프랑스 헌법 49조 3항은 정부가 예산안이나 사회 보장 재정 법안 등을 국무총리의 책임 하에 상원 및 하원의 의회 표결을 없이도 입법 할 수 있게 허용한다. 단, 의회가 총리를 포함한 내각에 대해 과반수의 찬성으로 불신임할 경우, 해당 법률의 입법이 무효가 되도록 했다.
집권 정당연합 ‘르네상스’의 의석수는 250석으로, 야당이 모두 찬성하면 불신임안은 가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금 개혁에 우호적인 우파 공화당(LR)이 정부편을 들었다. 올리비에 마를렉스 공화당 하원 대표는 “우리의 연금 제도를 구제하고, 은퇴자의 구매력을 보호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 등에 따르면 이날 61명의 공화당 하원 의원 중 42명이 불신임안에 반대하고 19명은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안은 이제 의회 입법 절차를 마무리한 것으로 보고, 한국의 헌법재판소 격인 헌법위원회의 승인을 앞두게 됐다. 보른 총리는 헌법위원회에 가능한 한 빨리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뉘프와 국민연합 등 야당은 “위헌 여부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야당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의회를 통한 정부 불신임이 부결됨에 따라 국민에 의한 불신임(국민 투표)을 추진하겠다”며 “(노조의) 연대 총파업과 전국적인 반대 시위를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불신임안 부결 소식이 알려지자 파리 앵발리드 근처 보방 광장에는 수백명의 강성 노동 조합원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해산을 요구하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항했고, 경찰은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강경 노동총연맹(CGT)은 성명을 내고 “불신임안 부결이 노동자의 결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23일 예정된 연대 총파업 및 시위에 가능한 많은 조합원과 시민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의 연금 개혁 법안은 연금 100%를 받을 수 있는 법정 은퇴 연령(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2년 늦추고, 연금 기여 기간을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1년 늘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근로 기간을 늘리는 대신 연금 상한액을 최저임금의 75%(월 1015유로·약 135만원)에서 85% 수준(월 1200유로·약 160만원)으로 올린다. 프랑스 8개 노동 단체들은 그러나 이에 반대하면서 지난 1월 중순부터 총 8차례에 걸쳐 연대 총파업과 시위를 벌여왔다. 우파 공화당을 제외한 프랑스 야당 역시 “국민이 원치 않는 개혁”이라며 반발해 왔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프랑스인의 약 70%가 정년을 연장하는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러나 연금 재정 악화로 인한 국가 재정 파탄을 막아야 한다며 연금 개혁안을 밀어붙였다. 프랑스는 65세 이상 인구가 21%에 달하는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연금 재정이 올해부터 적자로 돌아서고, 2030년에는 2030년 135억 유로(약 19조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프랑스가 연금에 지출하는 비용은 국내총생산(GDP)의 15.9%에 달한다. 이는 유럽연합(EU) 평균인 13.6%보다 2.3% 포인트 높다.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 개혁에는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며, 노동력 부족에 대처해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등의 이유도 있다. 그는 2017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됐을 때부터 연금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2019년 말엔 연금 재정의 가장 큰 부담이 되는 42개 특수 연금을 폐지하는 개혁안을 내놨으나 노조의 총파업으로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