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 림짜른랏 /AP 연합뉴스

14일(현지 시각) 태국 총선에서 군주제 개혁과 징병지 폐지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운 피타 림짜른랏(43) 후보의 전진당(MFP)이 20·30대 젊은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당 자리에 올랐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인 패통탄 친나왓(37)이 이끄는 프아타이당도 선전했지만 2001년 이후 22년 만에 처음으로 1당 자리를 내줄 처지가 됐다.

이로써 군부 축출을 내건 양대 야당이 500석의 하원 의석 가운데 300석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했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쁘라윳 짠오차(69) 총리가 이끄는 루엄타이쌍찻당(UTN)과 쁘라윳 웡수완(78) 부총리의 빨랑쁘라차랏당(PPRP) 등 군부 정당들은 80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어느 정당도 태국 행정부 수반인 총리를 차지하는 데 필요한 376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군부 축출을 공약한 2대 야당이 확보한 의석도 300석이 조금 안 된다. 이 때문에 총리가 선출되는 7월말·8월초까지 태국 정치권이 연정(聯政) 경쟁으로 상당한 진통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15일 새벽 6시 14분 현재(개표율 94% 기준) 피타 후보가 이끄는 전진당(MFP)은 500명의 하원 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포함해 151석을 확보한 것으로 예상된다. 패통탄의 프아타이당이 141석으로 뒤를 이어, 군부 축출을 내건 양대 야당이 모두 292석을 차지할 것으로 집계됐다.

군부 정당인 루엄타이쌍찻당과 팔랑쁘라차랏당은 각각 36석, 40석을 얻는 데 그쳤다. 중도 세력으로 분류되는 품차이타이당은 70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됐다. 태국 선거관리위원회의 최종 선거 결과는 선거일 60일 이내인 7월 중순 쯤 발표된다.

이번 총선의 관전 포인트는 패통탄이 9년간의 군부 집권의 막을 내리고 탁신계의 부활을 이끌어낼지, 군부 통치가 유지될지였다. 하지만 어떤 정당도 연정 없이 단독으로 총리 자리를 따낼 만큼 충분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의회가 선출하는 총리는 군부가 임명한 상원 250명과 이날 총선에서 뽑은 하원 500명 등 750명 가운데 과반 이상인 최소 376석을 확보한 정당이나 연정 세력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76석을 차지하는 세력이 집권

군부 축출 기조를 공유하는 전진당과 프아타이당이 연정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376석을 확보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상원 250명은 거의 대부분 군부 정당이 내세운 총리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진당의 피타 후보는 총선 투표가 끝난 14일 오후 5시 직후 전진당의 페이스북을 통해 탁신계 프아타이당과의 연정을 제안했다.

군부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고정표나 다름없는 상원 250명이 예외없이 군부를 지지한다고 가정해도 76명의 하원 당선자와 합치면 326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도 성향 품차이타이당 등 다른 중도 정당과의 연정 여부에 따라 총리 구도가 판가름날 전망이다. 가령 하원 70석을 얻은 품차이타이당과 연정에 성공하는 경우 전진당·프아타이당 등 군부 축출 세력이나 루엄타이쌍찻당·팔랑쁘라차랏당 등 군부 세력 모두 총리를 차지할 수 있다.

아누틴 찬위라꾼 부총리 겸 보건장관이 이끄는 품차이타이당은 2019년 총선에서 군부 주도의 연립정부에 참여한 전력이 있지만, 이번 연정 논의에서 군부와 연립 내각을 구성할지, 패통탄·피타 연정 세력과 손을 잡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총선에는 70개의 정당이 후보를 냈다.

◇하버드 나온 MZ 영웅의 예상 밖 선전

뉴욕타임즈와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들은 이번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선전한 전진당의 피타 후보에 주목했다. 40대 기수인 피타 후보는 군부 축출과 함께 태국에서는 민감한 이슈인 군주제 개혁, 징병제 폐지, 동성결혼 합법화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어 20·30대 MZ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표를 끌어모았다.

그는 태국 민주화의 상징인 국립 탐마삿대학을 졸업하고, 선친이 운영하던 쌀겨 기름 회사를 잠시 맡아 운영했다. 이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정책학 석사, MIT(메사추세츠공과대) 슬론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각각 땄다. 2017년~2018년 동남아시아 모빌리티 플랫폼 ‘그랩’의 태국 법인인 ‘그랩 타이’ 임원으로 일했고, 2019년 전진당의 전신인 미래선진당(FFP) 총선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20년에는 새롭게 출범한 전진당의 당수가 됐다.

패통탄이 피타 후보 등과의 연정으로 가문의 복수에 성공할지도 주목된다. 2001년 총리직에 올라 2005년 총선 승리로 연임한 탁신 전 총리는 왕실·군부와 갈등을 빚었고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2008년 탁신 전 총리의 매제이자 패통탄의 고모부인 솜차이 웡사왓이 총리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정당 해산으로 실각했다. 2011년 탁신의 여동생이자 패통탄의 고모인 잉랏 친나왓이 총리가 됐지만 2014년 군부 견제 여파 등으로 물러났다.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의 딸 패통탄 친나왓./로이터 연합뉴스

군부 축출을 내세운 프아타이당은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프아타이당은 코로나 이후 고(高)물가, 가계 부채 급증 등으로 힘들어하는 유권자들을 겨냥해 16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1만바트(약 40만원)의 가상 화폐를 지급하겠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다만 억만장자 기업가 출신 탁신 전 총리 가문은 집권 기간 부정부패와 비리 등이 구설에 올랐다.

전진당은 국왕 비판을 금지한 형법 112조 ‘왕실모독죄’ 개정을 골자로 하는 군주제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이를 두고 패통탄은 “의회에서 논의할 일”이라며 말을 아껴왔다. 태국에서 군주제 개혁을 논의하는 것은 금기(禁忌)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