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son walks towards the entrance of a pub in London, Britain, February 4, 2023. REUTERS/Henry Nicholls

영국 맥주 회사들이 소비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낮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이들이 맥주 가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세금을 덜 내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게 아니냐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17일(현지 시각) 유명 맥주 브랜드들이 소비자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ABV)를 낮춰 왔다고 보도했다. 올해 초 영국에서 인기가 많은 포스터(Foster’s)는 알코올 도수를 4%에서 3.7%, 올드 스페클드 헨(Old Speckled Hen)은 5%에서 4.8%로 낮췄다는 것이다. 지난 1698년에 세워져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인 셰퍼드 님(Shepherd Neame)도 지난 3월부터 자신들이 만드는 비숍스 핑거(Bishops Finger)와 스핏파이어(Spitfire)의 알코올 도수를 각각 5.4%에서 5.2%, 4.5%에서 4.2%로 낮췄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현지에서는 양조업계가 세금을 낮추기 위해 꼼수를 썼다는 주장이 나온다. 영국에서는 오는 8월부터 주세 정책이 일부 바뀐다. 영국 조세 당국은 같은 용량의 술이라도 알코올 도수를 3단계로 구분해 도수가 높을수록 세금을 많이 물리는 방식으로 차등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주세 규정은 알코올 도수별 세금 부과 방침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따라 세금 부담을 피해 가기 위해 맥주 업체들이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낮췄다는 것이다.

새 제도가 시행되면 예컨대 비숍스 핑거의 경우 원래 도수를 유지하면 맥주 500mL 한병당 52펜스(약 740원)의 세금을 내야 하는데 5.2%로 낮추면 50펜스(약 715원)만 내면 되기 때문에 병당 약 25원을 절감할 수 있게 된다. 영국 셰필드 대학 콜린 앵거스 연구원은 “모든 양조장이 알코올을 0.3%만 줄여도 약 2억5000만파운드(약 4100억원)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세금은 적게 내 결과적으로 원가 부담은 낮추면서도 맥주 가격은 그대로 유지해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사실상 없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이런 행태를 빗대 드링크플레이션(drinkflation)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품의 크기나 중량을 줄여 사실상 값을 올리는 효과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에 빗댄 것이다. 데일리메일은 “병과 캔의 모양이나 크기에는 변화가 없고 같은 양의 액체가 들어 있기 때문에 드링크플레이션이 슈링크플레이션보다 더 교활하다”며 “소비자들이 같은 돈을 내고 자기도 모르게 몇 달씩이나 약한 도수의 맥주를 마셔온 것”이라고 했다.

FILE PHOTO: Customers are seen inside the Little Driver pub in east London January 26, 2012. Picture taken January 26, 2012. REUTERS/Eddie Keogh (BRITAIN)/File Photo

소비자들의 비판에 직면한 맥주회사들은 서로 다른 해명을 내놓고 있다. 올드 스페클드 헨을 만드는 그린 킹(Greene King)은 “원자재 포장비,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는 등 생산 비용이 증가한 데 따른 조치”라고 했다. 사실상 세금을 포함한 원가를 낮추기 위해 알코올 도수를 낮췄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반면 셰퍼드 님은 “소비자들이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점점 알코올 함량이 낮은 음료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셰필드대 앵거스 연구원은 “주류 업자들이 오랫동안 (음주와 관련한) 공공보건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이력을 감안하면, 이들이 알코올 도수를 낮추려는 건 경제적인 목적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영국은 선술집 펍(pub)을 자국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여길 만큼 맥주는 영국인들 일상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영국 양조업계에서는 비용 상승을 이유로 맥주 가격을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몇 년 전부터 이어졌다. 영국 맥주 및 펍 협회 최고 경영자인 에마 매클라킨은 영국 주류 전문 잡지인 ‘더 드링크 비즈니스’에 “양조업계가 맥주 가격을 인상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금융기관인 라보뱅크는 양조업계와 관련된 올해 1분기 보고서에서 “내년에는 임금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맥주 업체들이 추가적인 원가 상승에 직면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경영상 어려움으로 문을 닫는 양조장도 속출하고 있다. 영국 유명 맥주 업체인 비어 누보(Beer Nouveau)에 따르면 2022년 영국에서 80개 이상의 양조장이 파산했고 이는 연간 기준으로 볼 때 사상 최고치였다고 한다. 영국 독립 양조협회 관계자는 “원자재나 에너지 비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면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규모의 경제’가 아니면 수익성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