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현지 시각) 오후 2시, 하루 75만명의 승객이 이용하는 뉴욕 맨해튼 중심가인 그랜드 센트럴역 인근 루스벨트호텔 앞은 난민 캠프를 방불케 했다. 호텔 외벽을 따라 세워진 철제 펜스 안쪽엔 폭염으로 땀에 전 옷을 입은 사람 200여 명이 길바닥에 붙어 앉거나 누워 있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에콰도르⋅콜롬비아⋅페루 등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이주자들이다. 자국의 암울한 현실을 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에 미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맞고 있는 상황은 기대와 전혀 다르다. 뉴욕시의 대표적 이주자 수용 시설인 루스벨트호텔은 이미 가득 차 더 이상 밀려드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전 거주자가 나가 방이 빌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주자들은 씻지도 못하고 인도(人道)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검은 비닐 봉투 하나가 이들의 유일한 사적(私的) 공간이다.
루스벨트호텔 주변은 중앙역 격인 그랜드센트럴과 록펠러센터, 명품 거리인 5가(Fifth Avenue) 바로 옆이다. 미국 최대 도시 뉴욕 한복판의 어지러운 풍경은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과 다양성을 중시해온 뉴욕이 쏟아지는 이주자 문제로 겪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호텔 옆 인도는 이주자들이 점령해 시민이나 관광객은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차도로 보행자가 내려가 걷는 탓에 차들은 엉켜 경적을 울려댔고, 경찰 수십 명이 “차가 지나다니니 거리로 내려오지 마시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뉴욕시청 직원과 경찰이 피자 다섯 판씩을 들고 이주자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음식을 달라고 갈구하는 손이 튀어나왔다. ‘미국의 심장’이라기보다 전쟁터의 난민 수용소 같은 풍경이었다. 피자를 먹는 세 명의 무리에게 “어디 출신인가요”라고 묻자 이들은 쏘아보며 한 문장으로 답했다. “노 잉글리시(영어 못 해)!”
상황은 앞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뉴욕시는 최근 “지난봄부터 (7월 말까지) 9만3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이들을 수용할 시설이 부족한 상황이 됐다”면서 “뉴욕 시민들은 앞으로도 매일 수백 명의 이주자들이 뉴욕에 도착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주자 문제는 코로나 이후 국경이 다시 열린 미국의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 중 하나다. 내년 11월에 있을 미 대통령 선거의 핵심 의제이기도 하다. 공화당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강력한 이주자 통제 정책을 펴며 논란이 되자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민주당은 전반적으로는 규제를 완화하되 이들을 보다 질서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코로나 종식에 중남미 국가의 경제난이 겹치면서 미국 남부 플로리다⋅텍사스⋅애리조나주의 접경 지대엔 미국에 불법으로라도 입국하려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자국에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인권을 유린당했다고 주장하며 보통 망명 신청을 한다. 문제는 중남미와 국경을 맞댄 주(州)들이 대부분 공화당 주지사가 있는 ‘보수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들 주의 주지사들은 이주자들이 도착하면 이들을 버스에 태워 뉴욕⋅시카고⋅워싱턴 DC 등 민주당 강세 지역으로 보내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이주자 친화 정책을 폈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알아서 지라는 취지다.
올해 들어 하루 300~500명씩, 남부 국경에서 뉴욕과 시카고로 이주자가 보내졌고 시간이 지나며 이주자 유입은 결국 도시가 감당 못 할 수준으로 치달았다. 시카고는 이주자들이 밀려오자 지역 경찰서를 비우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했지만 지난 5월 “모든 이주자를 환영해야 한다는 가치에 따라 망명 희망자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한계를 넘어섰다”며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뉴욕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뉴욕시는 1981년 법원에서 ‘쉼터 권리(right to shelter) 명령’이라는 규정을 정했다. 이에 따라 뉴욕시는 오후 10시 이전에 쉼터에 도착하는 자녀가 있는 노숙자 가족에겐 요청받은 당일 밤 쉼터를 제공해야 한다. 뉴욕시는 이 규정에 따라 이주자들을 쉽게 받아주었다가 도시가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뉴욕시는 올해 초부터 호텔을 통째로 빌리는 방식으로 이주자 숙소를 마련했지만 한계에 다다르자 병원이나 학교 일부를 개조해 이들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주자 유입 속도를 숙소가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루스벨트호텔처럼 이주자들이 거리로 넘쳐흐르는 상황을 맞게 됐다.
현지 언론은 보수⋅진보 불문하고 ‘묻지 마 수용’에 가까운 뉴욕시의 이주자 정책을 비난하고 있다. 친(親)민주당 계열인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30일 기사에서 “이주자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지원 등을 기대하며 버스에 탑승했다. 하지만 정작 뉴욕에 도착해선 자신들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전했다. 무분별한 이주자 포용이 이주자들에게도 독(毒)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주자들에게 제공하는 숙소와 음식 비용을 뉴욕 시민이 낸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데 대한 반발도 크다. 뉴욕시는 현재 호텔을 포함해 약 150개의 쉼터를 이주자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뉴욕시는 이주자 수용에 하루 약 100억원을 지출하고 있다. 에릭 애덤스 시장은 올해 초 “이주자들을 돌보기 위해 향후 2년간 약 40억달러(약 5조1700억원)를 사용해야 할 전망”이라며 “이는 뉴욕 시민에게 제공되어야 할 서비스 비용 삭감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했다. 뉴욕시는 예산 절감을 이유로 공공 도서관 이용 시간, 고령자를 위한 무료 식사, 3세 아동을 위한 무료 종일제 보육 등의 서비스 축소를 검토 중이어서 이주자 예산이 불어날수록 시민들의 반발은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