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전기(傳記) 영화 오펜하이머가 국내 개봉 5일째인 19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오펜하이머는 핵이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로 말년을 ‘군축(軍縮)의 아버지’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뜨고 이듬해 유엔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채택된 지 50여년이 흘렀음에도 세계의 핵무기는 계속 불어나고 있다. 영화의 원작에 해당하는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서문에서 저자(카이 버드, 마틴 셔윈)는 “전 세계적으로 냉전은 종식됐지만 오펜하이머가 1946년에 제안했던 핵무기 국제 통제 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썼다. 오펜하이머의 공포가 현실이 된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傳記) 영화 오펜하이머가 국내 개봉 5일째인 19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유니버설픽처스 코리아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폭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돼 2차 세계대전 종식의 결정타가 됐다. 오펜하이머는 하지만 자신이 개발을 이끈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확산해 인류를 파괴할 위험한 무기가 될 것을 우려했다. “핵무기 철폐는 문명의 생존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고도 했었다. 핵 무기의 확산을 멈추겠다는 오펜하이머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달 러시아 레닌그라드주 크론시타트의 박물관을 방문해 함께 둘러보고 있다. 17일(현지 시각) CNN에 따르면 동맹국 러시아의 핵무기를 넘겨받아 배치한 루카셴코 대통령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침략이 있을 경우 즉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AFP 연합뉴스

무기가 다시 쓰인 적은 없지만, 이를 토대로 한 위협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17일(현지 시각)만 해도, 동맹국 러시아의 핵무기를 넘겨받아 배치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침략이 있을 경우 즉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초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혹시라도 러시아가 보유한 4400개 넘는 핵탄두 중 하나가 쓰일 경우 막대한 사상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를 전세계에 드리우고 있다. 지난 18일 한·미·일 정상이 발표한 ‘캠프 데이비드 원칙’에 “핵무기가 다시는 사용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은 이런 상존하는 핵 위협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5일(현지 시각) 인도 뭄바이에서 한 학생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에 맞춰 진행된 평화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AP 연합뉴스

미국과학자연맹에 따르면 올해 전세계 핵탄두 수(실전 배치·미배치 포함)는 9576기에 이른다. 핵탄두 수는 2017년 9282기로 바닥을 친 후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2018년 이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증가했다.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는 계속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2017년 취임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미국 제일주의’가 러시아 등 핵 보유국을 자극했다고 분석했다.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는 “트럼프 집권 이후 심화된 미국 제일주의는 기존 레짐(regime·지배구조)의 파괴를 불러왔다”며 “불안정성의 증가는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국가의 군비 확장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2017년 핵탄두 수 4300기를 기록한 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다가 2021년 핵탄두를 돌연 4495기로 크게 늘렸고 지금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시기에 핵탄두 수를 가장 많이 늘린 국가가 러시아다.

그래픽=김의균

중국 또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집권(2013년) 이후 핵무기를 눈에 띄게 늘리고 있다. 2013년 250기였던 핵탄두 수가 2017년 270기, 올해는 410기로 늘었다. 시 주석 집권 후에만 160기가 늘었다는 뜻이다. 1971년 100기에서 2013년 250기에 이르기까지 40년 걸렸던 핵 확산 규모를 불과 10년 만에 이룬 셈이다.

중국의 핵 확산은 2013년쯤 경제적으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는 자체적 판단에 이어 군사적 측면에서도 ‘세계 2강’의 지위를 얻겠다는 목적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강준영 교수는 “중국은 앞으로도 당분간 핵탄두를 늘려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항공모함과 핵탄두를 찍어내듯 제작하는 것은 미국과 (군사적으로) 견줄만 한 수준이 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측면이 있다”라고 분석했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패권은 10년 전부터 저물고 있고, 세계는 다극체제·각자도생의 시대로 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벌어지면서 군비 경쟁이 동북아·유럽 할 것 없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지난 3월 27일 핵무기병기화사업을 지도하면서 핵무기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것을 재차 지시했다. '화산-31'로 명명된 것으로 보이는 새 핵탄두 혹은 '핵 카트리지'가 대량생산된 모습도 공개됐다./노동신문 뉴스1

뒤늦게 핵개발에 나선 ‘핵 신흥국’도 핵무기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 북한(증가율 100%), 인도(26%), 파키스탄(21%), 이스라엘(13%) 등이 2017년 이후 현재까지 핵탄두 수를 많이 늘린 국가들이다. 미 과학자연맹에 따르면 북한의 핵탄두는 2017년 15기에서 올해 30기로 늘었다. 미국(-3%), 프랑스(-3%)가 줄여나간 핵무기를 이들이 추가 핵 개발을 해서 다시 끌어올리는 상황이다.

이들 국가의 핵 확산 속도가 빨라진 배경엔 저렴해진 개발비가 있다. 1940년대 미국이 오펜하이머 주도로 처음 핵을 개발할 당시 투입된 비용은 22억달러였다. 물가를 감안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30억달러(약 42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다. 북한이 핵개발에 들인 총 비용은 최대 15억달러(약 2조원) 수준으로 80년 전에 비하면 훨씬 적은 금액이다.

오펜하이머는 개발비가 낮아지며 핵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할 국가들까지 핵개발에 나서는 상황을 우려했는데, 북한이 전형적인 사례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서문엔 이런 말이 나온다. “얼마 전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인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 과학, 문화, 상업의 주류에서 고립되어 있고 심지어 자국민을 먹여 살리는 데조차 실패한 국가가 핵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는 핵무기의 전 세계적 확산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일(현지 시각) 모스크바에서 열린 훈장 수여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 푸틴 대통령은 참전 군인들과 교육, 과학, 의학,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한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앞서 부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압박이 거세지자 미국과 맺었던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뉴스타트는 양국이 실전 배치 핵탄두수를 2026년까지 1550기로 줄이겠다는 약속으로 앞서 1991년 소련 붕괴 후 맺었던 스타트(2009년까지 핵탄두수 6000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협정이었다./AP 연합뉴스

이처럼 핵 확산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기존 핵 보유국들이 추진해오던 핵 감축 노력은 무색해질 위기에 처했다. NPT는 이미 유명무실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압박이 거세지자 미국과 2019년 맺었던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 참여 중단까지 선언했다. 뉴스타트는 양국이 실전 배치 핵탄두 수를 2026년까지 1550기로 줄이겠다는 약속으로 앞서 1991년 소련 붕괴 후 맺었던 스타트(2009년까지 핵탄두 수 6000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협정이었다.

미그-31 전투기에 장착된 러시아 극초음속 미사일 '킨잘'. 마하 10의 속도로 2000~3000km 떨어진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다. 킨잘은 요격이 어려운데다 핵탄두 탑재가 가능해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조선DB

전문가들은 핵탄두의 증가보다 더 큰 문제가 핵 관련 기술의 현대화라고 지적한다. 극초음속 미사일 등 파괴력이 높은 신무기들이 개발되면서 기존의 핵 방어 능력이 무력화되고, 상대국이 더 강한 무기를 개발하는 등 악순환에 돌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국제 반핵단체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이 지난 6월 발표한 2022년 전세계 핵무기 지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핵무기 투자 규모는 2019년 729억달러, 2020년 726억달러, 2021년 824억달러, 2022년 829억달러(약111조원) 등으로 계속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전이 여전히 진행되는 상황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무기 제공이 오히려 핵위협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봉근 교수는 “수십년간 강대국이 자국 영토를 침범당한 적이 없지만 최근엔 러시아 본토가 사실상 공격을 받고 있다”며 “안보적 이유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체면 등을 고려하면 전황이 급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의 댄 스미스 소장은 최근 미국 의회 전문 매체 더힐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시기로 흘러가고 있다”며 “지정학적 긴장을 완화하고 군비 경쟁을 늦추기 위해 각국 정부가 협력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