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터졌을 때 고아원에서 살고 있어서, 거기서 미군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老)교수는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한다고 했다. 북한에서 쫓겨 온 소녀는 미군 부대 앞 고아원에서 어깨너머로 영어를 배웠다. 그러다 전국의 미군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자랐다. 한미 동맹의 역사인 이청자(82) 메릴랜드대 글로벌 캠퍼스(UMGC) 객원 부교수를 지난 25일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만났다.
“그때 미군들은 내 곁에 있어주고, 안아주고, 노래 불러주고… 부모와 마찬가지였어요.” 이제 ‘은혜를 갚는 자식의 마음’으로, 31년째 전국의 미군 기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 교수는 194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 가족과 함께 남하해 충북 제천에 정착했는데 얼마 안 가 6·25가 터졌다. 이북에서 지주였던 아버지는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어머니는 피란길에 헤어졌다. 두 살 터울 남동생과 강원도 춘천의 고아원에 닿았다. 아홉 살이었다. 고아원 맞은편에 미군 부대 ‘캠프 페이지’가 있었다. 미군들은 그가 있던 애민보육원을 ‘아멘(Amen)’ 보육원이라면서 정기적으로 찾아왔다. 이 교수는 “천운이었다”고 했다.
미군들은 소녀의 세례명 “엘리자벳”을 부르며 초콜릿을 주고 “감사하다고 말해 보라(Say Thank you)”고 했다. “커다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한국이 어디 있는지, 미국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줬어요. 고아원 담장 안이 전부였던 저에게 더 넓은 세상을 알려준 거죠. 그들 덕에 마음이 굶주리지 않았어요.”
열일곱에 보육원을 나와 일을 하다 결혼 후 아들을 낳고, 강원 원주에서 조그만 문구사를 열었다. 마흔둘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봤다. 고교 검정고시도 통과했다. 이후 상지대학 병설 전문대학 관광영어통역과, 상명여대 영문과를 거쳐 상지대에서 영어교육 석사를 땄다. 당시 우연히 만난 한 미군 장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 앨범 속에 고아원 아이들 사진이 한가득이었다. 아버지 소속은 춘천 캠프 페이지였다”라고 말했다. 그때 다짐했다. “나를 살렸던 그 군인들의 아들과 손자들이 한국에 왔구나. 이제는 내가 도와야겠다.” 마침 원주의 ‘캠프 롱’에 있던 수녀님이 “한국어를 참 잘 가르친다. UMGC에 한국어 강사로 이력서를 내보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1992년부터 지금까지 1000명 이상의 주한 미군들이 이 교수의 한국어 강의를 들었다. 현재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서 주 2회 한국어 수업을 한다. 20여 년 동안 한국 주부들을 상대로도 틈틈이 영어 교육 봉사를 했고 그중 수백 명이 대학에 진학했다고 했다.
“지금의 저는 미국이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어요. 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미국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에 와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선진국 대열에 올라 당당히 세계와 경쟁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과 미국은 ‘영원히 함께 가야 할 파트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