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대한 답을 하세요!”
아서 엔고론(74) 미국 뉴욕주 맨해튼 지법 판사가 지난 6일(현지 시각) 맨해튼 법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날 트럼프는 자신의 회사가 은행 대출을 쉽게 받기 위해 뉴욕 저택과 빌딩 등 담보 자산의 가치를 2011~2021년에 최대 36억달러(약 4조8000억원) 부풀린 혐의와 관련해 재판에 출석했다. 트럼프는 골프장 등 자산 가치를 부풀렸느냐는 뉴욕주 검찰 추궁에 “(나의) 스코틀랜드 애버딘 골프장은 최고의 코스를 갖고 있는 예술적인 곳” “나는 브랜드 가치 때문에 대통령이 됐다”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재판장인 엔고론은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에) 맞지 않는 얘기”라며 트럼프를 제지시킨 것이다. 이날 트럼프의 한 변호인은 법정에서 “(트럼프는) 아마도 미래의 대통령”이라며 트럼프가 내년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다는 ‘협박’으로 들릴 수 있는 말도 했다. 그러나 엔고론은 “(변호인은) 앉으세요”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당신의 의뢰인(트럼프)을 통제해 주기 바란다”고 경고했다. 이날 트럼프는 쉬는 시간에 재판정을 나서며 카메라 기자들을 향해 손으로 입을 걸어 잠그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엔고론이 트럼프에게 재판 관련 발언을 법정 밖에서 하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날 뉴욕타임스(NYT)는 “한 판사(엔고론)가 다른 사람들은 거의 성공하지 못한 트럼프를 억제하는 일을 시도했다”고 했고, 로이터는 “(엔고론) 판사는 누가 재판의 책임자인지를 명확하게 했다”고 했다. 내년 대선 유력 후보를 눈앞에 두고 ‘간 큰 재판’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전날 소란스러운 재판이 있었던 탓인지 7일 열린 같은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트럼프의 딸 이방카는 ‘세련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고 NYT는 전했다. 이방카는 자산 가치 조작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내 업무가 아니어서 모른다”고 했다.
엔고론 판사는 택시 기사, 드러머, 피아노 강사 경력이 있고 세 번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뒀다. 헝클어진 흰 머리, 움푹 들어간 볼, 화려한 셔츠와 넥타이로 유명하다. AP 등에 따르면 그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은 ‘평정심이 있고 헌신적이며 영리한 판사’로 묘사했다.
엔고론은 법관 외길 인생과 거리가 멀었다. 뉴욕 퀸즈에서 태어나 롱아일랜드 나소 카운티에서 자랐고 명문 컬럼비아대 재학 시절 택시 운전을 했다. 과거 인터뷰에서 “(택시 기사의) 자유, 즉각적인 현금 보상, 사람들과 만나는 것, 광적으로 운전하는 것이 좋았다”고 ‘뉴욕의 택시 운전기사’ 생활을 묘사했다.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2년간 한 로펌에서 일하다가 돌연 떠나 7년 동안 피아노와 드럼을 가르쳤다. 43세이던 1993년 법조계로 복귀, 뉴욕 대법원에서 로클러크(law clerk·판사 서기) 근무를 시작했다. 이어 2003년 뉴욕시 민사법원 판사로 선출됐고 2013년 뉴욕주 대법원 판사가 됐다.
그는 평소 재판에서 위계를 강조하기보다 자신을 돕는 판사 서기에게도 많은 권한을 줬다고 한다. 또 재판 중간 농담을 던지는 등 부드럽게 재판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NYT는 “엔고론은 법정에 판사가 입장할 때 일반인이 기립하지 못하도록 했다”면서 소탈한 면모를 전했다. 그런데 이번 트럼프 사건만큼은 다소 엄격한 태도다. 지난달 트럼프 측은 재판 일정을 늦춰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엔고론은 기각했다. ‘재판 지연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법원을 비방하는 글과 사진을 게시해 ‘공표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총 1만5000달러(약 2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엔고론이 트럼프와 마찰을 벌일수록 트럼프 지지자들이 인터넷 등에서 엔고론을 위협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법원 보안 요원들이 출퇴근 시 엔고론을 보호하고 있다. 엔고론은 개인적으로 이런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한다. 엔고론의 전·현직 동료들은 ABC 방송에 “그가 전문적이고 책임감 있게 재판을 진행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한편 미 법조계에서는 “트럼프가 엔고론을 공격하는 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재판은 민사 소송이기 때문에 형사 재판과 달리 배심원단이 아닌 판사가 검찰이 제출한 증거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판결한다. 엔고론의 손에 트럼프와 그의 회사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엔고론은 트럼프 타워 등 뉴욕에 있는 트럼프의 주요 부동산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할 권한도 갖고 있다.
-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39
🌎국제퀴즈 풀고 선물도 받으세요! ☞ https://www.chosun.com/members-event/?mec=n_qu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