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상원과 하원이 4일 합동 회의를 열고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헌법 개정안을 승인하자 에펠탑에는 ‘내 몸은 내 선택’이라는 문구가 띄워졌다. / 로이터 뉴스1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낙태(임신중절 수술을 통한 유산)할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을 헌법에 담았다. 프랑스를 포함해 네덜란드·독일·캐나다 등 법률로 낙태를 허용한 나라는 많지만, 헌법에 낙태할 자유를 못박은 경우는 프랑스가 처음이다. 프랑스 상원과 하원은 4일 베르사유궁전에서 합동 회의를 열고 헌법 34조에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을 추가하는 헌법 개정안을 찬성 780표, 반대 72표로 가결했다. 상원과 하원 의사당이 파리에 따로 있지만, 상원과 하원이 중대한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합동 회의를 열 경우 파리 외곽 베르사유시 베르사유궁전에 모인다. 양원 의원 925명 가운데 902명이 참석했고, 개헌에 반대했던 제라르 라셰 상원 의장 등 50명의 기권표를 제외한 852표 가운데 찬성표가 5분의 3 이상인 의결 정족수(512명)를 훌쩍 넘겼다.

그래픽=백형선

교황청이 이날 표결 직전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있을 수 없다”는 반대 성명을 내는 등 반대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80% 이상의 국민들이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압도적으로 우세한 찬성 여론이 개헌을 이끌었다. 올해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둔 상황에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의원 91명 중 49명도 찬성표를 던졌다.

성범죄 피해 여부 등을 따지지 않고 임신 14주 이내 중절 수술을 허용하는 등 폭넓은 낙태의 자유가 이미 보장돼 있는 프랑스에서 헌법에 낙태할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서 당장 바뀌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최상위법인 헌법에 조항을 따로 만든 이유는 법원 판결이나 의회의 법률 제·개정 등으로 여성의 낙태권을 후퇴시키는 일이 없도록 쐐기를 박기 위해서다.

4일 야엘 브룬 피베(왼쪽에서 둘째) 프랑스 하원 의장과 가브리엘 아탈(왼쪽에서 셋째) 프랑스 총리 등이 파리 외곽 베르사유시 베르사유 궁전에 모였다. 이들은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을 추가한 헌법 개정안의 상·하원 합동회의 가결 후 이 조항이 담긴 헌법 34조 관련 문서에 의회 압인(壓印)을 찍는 행사에 참석했다. 작은 사진은 이 압인과 피베 의장의 서명이 담긴 34조 관련 문서. /AFP 연합뉴스

계기는 미국이었다. 2022년 6월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우위를 점한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약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다. 이후 공화당 세가 강한 주들은 생명 위급 등 상황이 아닌 경우 여성의 낙태를 금지하는 내용의 낙태 제한법을 속속 제정했다. “미국처럼 낙태권이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퍼졌고, 프랑스가 헌법을 고쳐 우려를 앞장서 불식시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합동 회의를 주재한 야엘 브룬 피베 하원 의장은 X(옛 트위터)에 “프랑스에서 낙태는 영원히 권리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우여곡절이 없진 않았다. 앞서 여당인 르네상스당 등이 주도하는 하원은 2022년 11월 ‘낙태할 권리’를 명시한 개헌안을 의결했는데, 3개월 뒤 야당인 공화당 등 보수 세가 강한 상원은 ‘낙태할 자유’로 표현을 바꾼 개헌안을 승인했다. 프랑스에서 헌법을 개정하려면 상원과 하원이 똑같은 문구의 개헌안을 의결해야 하기 때문에, 개헌은 무산됐다. ‘낙태할 권리’라고 적으면 국가가 낙태권을 앞장서 보장할 의무가 생기는 반면, ‘낙태할 자유’는 개인의 낙태를 국가가 막진 말아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에 그친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표현상의 차이에 집착하지 않고 헌법 개정 자체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난 1월 ‘낙태할 자유 보장’이라는 문구를 담은 개헌안을 직접 발의, 상·하원을 설득했다.

이날 개헌안이 통과되자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에는 수백 명의 시민이 모여 환호성을 질렀다. 에펠탑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나의 몸, 나의 선택’이라는 메시지가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띄워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투표 결과 발표 직후 X(옛 트위터)에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RN의 유력한 대선 후보 마린 르펜 의원은 “(개헌안이 통과된 이날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조직한 날일 뿐”이라면서도 개정안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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