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현직 부통령이 대통령을 청부 암살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자 대통령 측이 국가원수에 대한 중대 위협이라며 응징을 예고하는 등 권력 일·이인자의 전례 없는 정면충돌로 필리핀 정국이 격랑으로 치닫고 있다.
필리핀 대통령실은 23일 긴급 성명을 내고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이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그 가족들의 신변을 위협했다며 대통령과 대통령 가족의 신변을 위해 필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이 말하는 신변 위협이란 이날 공개된 두테르테 부통령의 온라인 인터뷰를 말한다. 두테르테는 “나를 겨냥한 암살 계획이 있다”고 주장하며 “만약 내가 살해당하면 (내 경호원에게) BBM(마르코스 대통령의 이니셜), 리자 아라네타(영부인), 마틴 로무알데스(하원의장)를 죽이라고 했다. 농담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실은 “부통령의 위협이 대중 앞에서 뻔뻔스럽게 표현된 것을 국가 안보 문제로 간주한다””며 사실상 처벌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갈등이 격화하던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두테르테 부통령이 완전히 척을 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1965~1986년 통치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고, 사라 두테르테는 직전 지도자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이다. 부친의 후광으로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2022년 선거에서 짝을 이뤄 출마했다. 필리핀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처럼 대통령·부통령 후보가 러닝메이트로 한 팀을 이루지만, 투표는 각각 한다. 두 사람은 60% 안팎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2022년 6월 정권 출범 뒤 마르코스 주니어가 전임 아버지 두테르테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손보면서 대통령·부통령의 갈등이 깊어졌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특히 전 정권의 친중( 親中)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강력한 친미 국가로 방향을 전환했다. 인권침해 논란을 일으켰던 두테르테 정권의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진상 규명에 나서면서 갈등은 깊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딸 두테르테는 지난 6월 자신이 겸직하던 교육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범정부 반군 진압 태스크포스 위원 자리도 내려놓는 등 마르코스 주니어와 대립각을 세웠다. 여기에 마르코스 주니어 측근 의원 주도로 부통령실 예산이 대폭 깎이고, 부통령 수석 보좌관에 대해 사법 당국이 예산 유용 혐의로 조사에 착수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대통령과 부통령 사이는 사실상 정적 관계 수준으로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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