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중국 광둥성 잔장시 우촨의 농촌 마을 미리링촌에 있는 중국 AI(인공지능) 스타트업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의 자택 앞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4층 건물인 량원펑의 집 대문 위에는 ‘성대한 복의 기운(鴻福)’, 대문 왼쪽으로는 ‘성대한 복을 맞이하며 가족이 잘되고 돈이 넘치길(接鴻福發丁發財)’, 오른쪽에는 ‘새로운 봄을 맞이해 모든 일이 순탄하길(迎新春大吉大利)’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이벌찬 특파원

중국 남부 광저우의 기차역에서 2일 오전 6시 첫차를 타고 세 시간, 차로 갈아타고 비포장 시골길을 다시 한 시간 가서야 닿은 외지고 작은 농촌 미리링촌(米歷嶺村)에 진입하자 곳곳에 ‘장원(壯元·수석)’이란 글자가 보였다. 밭에는 ‘장원 채소’, 닭꼬치 포장지에도 ‘장원 구이’라고 써붙이곤 웃돈을 얹어 팔았다. 검색해도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는 이 작은 마을은 미국 최첨단 인공지능(AI)에 버금가는 성능이 알려지며 세계를 뒤흔든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창업자 량원펑(梁文鋒·40)의 고향이다. 이 마을은 70가구가 전부 량(梁)씨인 집성촌으로 1000여 명이 산다. ‘장원’은 미리링 사람들이 작은 마을의 ‘공부 천재’에서 세계의 ‘AI 천재’로 솟아오른 량원펑을 부르는 별명이다.

마을의 청년 대표이자 량원펑의 사촌형 량원푸(42·인테리어업자)는 “이 마을은 1인당 월소득이 1000위안(약 20만원)도 안 되는 가난한 곳”이라고 했다. 량원펑은 지난해 중국의 IT 매체 인터뷰에서 “나는 1980년대에 광둥성의 5선(도시 분류 체계의 최하 등급) 도시에서 자란 아이고,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라면서 “1990년대 광둥성에선 조금만 큰 도시로 나가면 돈 벌 기회가 많았기에 어른들이 우리 집에 와서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라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자신을 ‘개천용(개천에서 난 용)’이었다고 묘사한 것이다.

1일 중국 광둥성 잔장시 우촨의 농촌 마을 미리링촌 입구에 거대한 ‘풍선 대문’이 들어선 모습. 이곳에서 태어난 AI 스타트업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의 성공을 축하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위에는 ‘미리링촌(米歷嶺村)’, 왼쪽에는 ‘원펑이 고향에 돌아와 훌륭한 성과를 알렸다(文鋒回鄕傳佳績)’, 오른쪽엔 ‘고향 마을 진흥에 힘을 더했다(鄕村振興添動力)’라고 적혀 있다. 과도한 ‘고향 마케팅’에 따른 비난을 우려한 마을 사람들이 1일 이를 철거해 지금은 없다. 사진의 글씨는 중국어 간체자(簡體字)./웨이보

30여년 전 어른들의 ‘공부 무용론’을 듣지 않았던 량원펑은 이제 공부로 자기 인생을, 그리고 국가를 바꾼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춘제(중국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이날 미리링으로 몰려든 수백 명 관광객들에게 ‘량원펑을 통해 무엇을 배웠나’라고 묻자 “공부가 운명을 바꾼다(讀書改變命運)”라는 답이 반복해 돌아왔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1966~1976년)으로 인해 폐지됐던 대학입시(가오카오)가 1977년 부활할 당시 중국을 휩쓸었던 이 구호는 량원펑의 성공이 알려진 후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문구가 됐다. 량원펑을 필두로 왕싱싱(유니트리) 등 중국 기술 기업 창업자들의 이공계 배경을 정리한 게시물도 유행하며 ‘부자들은 이공계’란 말도 돌고 있다. 중국 관영 언론들도 가세해 트럼프의 귀환으로 예고된 2차 미·중 기술 전쟁을 앞두고 전 국민 ‘기술 천재 만들기’에 박차를 가하는 분위기다.

◇딥시크 창업자 고향, 中 애국 성지로… ‘공부해 잘살자’ 48년 만에 유행

량원펑은 춘제 연휴 중 하루는 우촨, 이틀은 마을에서 보내고 지난달 29일 딥시크 본사가 있는 항저우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의 축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사촌 량원푸는 “이곳은 인구도 적고 땅도 나빠 젊은이들은 일찌감치 외지로 나가 건설·인테리어, 자재 등 몸 쓰는 업종에 주로 종사했고 그것을 성공이라 여겼다. 그런데 진득하게 공부만 하던 아이가 이 마을을 넘어 (마을이 속한) 잔장시 최고 부자로 등극한 모습을 보니 모두 얼마나 놀랐겠는가”라고 했다.

그래픽=김의균

그는 앞서 량원펑에 대해 묻는 기자를 마을 한가운데 설치된 천막 무대에 밀어 넣고 마이크를 쥐여줬다. 덩리쥔(鄧麗君)의 노래 두 곡을 완창하는 ‘신고식’을 치르게 하고 나서야 조용하게 대화를 나눌 마작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만큼 마을 전체가 들떠 있었다.

량원푸는 팔뚝만 한 죽통(竹筒) 물담배를 피우며 사촌 동생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번 춘제 연휴에 량원펑과 함께 축구를 했소. 그는 침착한 성격을 살려서 미드필더를 잘 해냈지. 량원펑은 그의 아버지처럼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오. 축구도, 기타도 다 설렁설렁 하는데 유일하게 열정을 불태웠던 게 수학(數學)이었지. 그가 열다섯 살 때 집에서 기하학과 대수 책을 게걸스럽게 읽는 모습을 본 기억이 아직 난다오.” 그는 “마을에서 그 누구도 량원펑이 그렇게 돈이 많은 줄 몰랐고, 그저 대도시에서 자리 잡고 산다니 다행이구나 여겼다. (지난달) 리창 총리를 만나고 미국 뉴스에 나오는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마을에서 만난 량원펑의 고향 친구들 또한 그가 공부에 매진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12㎞ 떨어진 명문 우촨제1중학교(吳川一中)에 조기 입학해 이곳에서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일대 우수 학생을 모조리 흡수한 이곳에서 어린 량원펑은 전교 최상위권을 유지했고, 2002년엔 17세 나이로 우촨시 가오카오(대학입시) 수석(狀元)을 차지했다. 가오카오 성적이 성(省) ‘장원’급으로 높았다는 량원펑은 당시 선지망·후시험 원칙에 따라 미리 써낸 중국 3위 대학 저장대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갔다. 중학교 담임이었던 룽(容)씨는 한 중국 매체에 “그는 수학 사고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단순한 ‘공붓벌레’는 아니었다. 공부와 휴식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고, 적은 시간을 들이고도 모든 과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했다.

중국 광둥성 미리링촌에서 2일 관광객들을 상대로 파는 꼬치구이에 ‘장원 고기구이(壯元燒烤)’라는 이름의 안내판을 세워 놓은 장면. 량원펑이 ‘딥시크’의 고성능 AI로 거둔 성공을 과거 ‘장원(1등) 급제’에 빗대 축하하는 의미다./이벌찬 특파원
"량원펑이 마을 행사 기부금도 냈어요" 2일 미리링촌에서 마을 주민이 량원펑이 3000위안(약 60만원)을 마을 연례 행사에 기부했다고 말하고 있다./이벌찬 특파원

공부로 성공한 량원펑을 낳은 미리링은 중국 학부모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할 성지(聖地)가 된 모습이었다. 선전시에서 대학생·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다섯 시간 동안 운전해서 왔다는 40대 남성은 “오는 길에 후이저우에서 로봇·우주 전시를 먼저 보게 한 다음 ‘정신 무장’을 위해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았다”고 했다. 옆마을에서 남편·형부 가족을 줄줄이 끌고 온 40대 여성 허씨는 “결국 공부가 삶을 바꾼다. 이 사실을 조카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충칭에서 온 60대 장씨는 “딥시크를 배출한 중국은 비로소 (어려움을 딛고) 일어났고, 강해졌다”며 ‘애국’을 강조했다. 톈진이공대학의 정보학과 재학생인 류모(22)씨는 “량원펑은 이상(理想)이 기술과 만날 때 ‘과기위국(科技爲國·국가를 위해 기술 연구)’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중국도 이제 인해전술(人海戰術)은 그만하고, 개개인이 탁월해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량원펑

방문객들이 줄 서서 ‘인증샷’을 찍는 량원펑의 생가(生家)는 마을에서 가장 번듯한 집이었다. 마을 주민 A씨는 “약 5년 전쯤에 량원펑이 돈을 대서 새로 지은 4층짜리 집인데 1층엔 90대 할아버지, 2층엔 큰삼촌 가족, 3층엔 작은삼촌 가족이 산다”면서 “량원펑의 부모는 초등학교 부부 교사로서 오래전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았는데 효심이 지극해 아버지를 보러 자주 온다”고 일러줬다. 5년 전은 량원펑이 딥시크 전에 창업했던 투자사 ‘환팡량화’가 큰돈을 벌던 때였다. 량원펑은 마을을 찾을 때마다 악기실로 꾸며진 이 집 4층에서 친척들과 같이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새해를 맞아 문에 붙인 춘롄(문·기둥에 써 붙이는 글귀)의 글귀는 ‘성대한 복의 기운(鴻福)’으로 부(富)의 활력이 넘쳐 흘렀다. 90대인 량원펑의 할아버지는 지난달 28일 갑자기 관광객이 몰려들자 문을 열어두고 관광객에게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량원펑의 또 다른 사촌형 량원타오(56)는 이날 “할아버지 량타이시는 1930년대에 광둥성 최고 대학인 중산대를 졸업한 수재였지만, 평생 마을에서 살았다. 그래도 결국 훌륭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신 셈”이라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달 말 마을 입구에 아치형 대형 풍선을 설치하고 ‘원펑이 고향에 돌아와 훌륭한 성과를 알리며 농촌을 부흥하게 만든다’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 량원펑이 가난한 농촌 마을을 잘살게 만들어주리라는 기대감을 담은 문구다. 실제로 마을은 ‘량원펑 특수’를 누리는 모습이었다. 결혼해 멀리 떠났다는 량원펑의 40대 고모뻘 친척은 이날 어린 자녀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마을 한가운데에 매대를 차리고는 ‘장원’이란 종이를 붙인 음료를 웃돈을 얹어 한 병 5위안(약 1000원)에 팔고 있었다. 마을의 한 50대 주민은 “마을 회의에서 ‘지나치게 량원펑을 상업화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긴 한다”면서 “마을 입구의 화려한 현수막과 아치형 풍선은 지난 1일 철거했다”며 웃었다. “고향 사람들이 너무 흥분해 국가의 자랑인 량원펑에게 흠집을 내서야 안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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