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D 밴스 미국 부통령이 14일 뮌헨안보회의(MSC)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세계 최대 규모의 비공식 군사 안보 회의인 뮌헨안보회의(MSC) 둘째 날 일정이 진행되고 있던 지난 15일 독일 뮌헨 바이어리셔 호프 호텔. 연단에 오른 주최국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가 굳은 표정으로 “파시즘과 인종주의와 공세적인 전쟁은 절대로 다시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독일의 절대다수는 나치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고 말했다. 숄츠는 ‘누가 나치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온 J D 밴스 부통령을 겨냥했다고 전했고 숄츠도 부인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권력 승계 1순위 밴스는 첫 정상 외교 무대에서 극우 정치 세력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이들을 규제하는 유럽 각국의 정책을 ‘비민주적인 행위’로 비판해 논란을 키웠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국가들을 배제한 채 러시아와 직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고, 이에 반발한 영국·독일·프랑스 등 주요국 정상들은 17일 프랑스에서 긴급 회동을 갖고 집단 대응을 모색하기로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로 결속해 전후 80년간 굳건히 자유 진영의 핵심 축으로 유지돼온 미국·유럽 동맹이 트럼프 2기 출범과 함께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양진경

밴스는 MSC 첫날인 14일 기조연설에서 “이것이 내가 받는 마지막 박수 갈채일 것”이라며 유럽을 겨냥한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새로 마을을 지키러 온 신규 보안관’에 빗대면서 유럽 동맹국들에 방위비를 증액하고 미국처럼 강력한 불법 이주 제한 정책을 펼치라고 요구했다.

밴스는 또 “유럽이 자유민주주의 근본 가치에서 후퇴하고 있다. 현재 유럽의 가치를 미국이 방어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독일을 겨냥해선 “민주주의는 국민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신성한 원칙에 기초한다. ‘방화벽’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방화벽’이란 독일 정치권이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연정 참여도 봉쇄하는 것을 말한다. 또 이슬람 경전 코란을 소각한 시민을 체포한 스웨덴 정부, 낙태 클리닉에서 낙태 정책에 반대하는 ‘기도 시위’를 벌이던 남성을 체포한 영국 정부 사례도 비판했다.

그러자 이어서 연단에 오른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유럽의 상황을 일부 권위주의 정권에서 만연하는 상황과 비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밴스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다른 유럽 정부와 언론에서도 밴스의 발언이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BBC는 “매우 기괴한 20분(밴스 연설 시간)으로 밴스가 농담을 해도 웃음을 보인 참가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유럽 정보 당국과 정치권은 이런 발언이 러시아의 선전전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밴스는 이날 뮌헨 시내에서 알리스 바이델 AfD 공동대표와 만났다.

뮌헨안보회의서 만난 밴스와 젤렌스키 - 지난 14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미국과 우크라이나 정부 고위 대표 양자 회담에서 J D 밴스(오른쪽에서 둘째) 미국 부통령의 발언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에서 둘째)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듣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전쟁 종전협상을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온 유럽 국가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하려 하는 등 최근 미국과 유럽 관계가 경색되고 있다. /AP 연합뉴스

밴스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독일 정치에 개입하려 한다는 논란까지 일고 있다. 독일이 23일 새 정부를 구성할 총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반(反)난민 정책을 주장해온 AfD는 20%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어 원내 2당으로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때문에 총선 직전 밴스가 AfD에 더욱 힘을 실어줘 극우를 배척하는 유럽 기성 정치권을 흔들려고 한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가 밀어붙이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서도 미국의 ‘유럽 패싱’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15일 “미국·러시아 간 첫 고위급 회동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일 내로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자 참석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날 통화를 갖고 ‘해묵은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정기적 소통 채널 복원에도 합의했다. 키스 켈로그 트럼프 행정부 우크라이나·러시아 특별대사는 협상에 유럽이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협상장이) 대규모 토론장이 되는 상황은 원하지 않는다”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대로라면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후 미국과 함께 단일 대오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소속 유럽 국가들이 협상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유럽은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우선 17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파리에서 영국·독일·이탈리아·폴란드 정상과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긴급 정상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모색한다. 곧 트럼프와 회동할 예정인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동맹의 분열로 인해 우리가 직면한 외부의 적으로부터 주의가 분산돼서는 안 된다”며 유럽 국가들의 우려를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뮌헨안보회의(MSC)

1963년 창설된 유럽 최대 규모의 연례 국제안보회의로 매년 1월 말 또는 2월 초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개최된다. 각국 정부 수반과 외교·국방장관, 주요 국제기구 대표, 학계 전문가 등이 참석해 범세계적·지역 안보 문제를 논의한다. 안보 분야의 ‘다보스포럼’이란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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