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실시된 독일 연방의회 총선에서 중도보수 야당 기독민주당(CDU)과 자매 정당 기독사회당(CSU) 연합(기민·기사 연합)이 전체 의석 630석 중 208석(득표율 28.52%)을 차지하면서 1위에 올랐다.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퇴임한 지 약 3년 2개월 만이다.
이로써 올라프 숄츠 현 총리가 소속된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에서 우파 연합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게 됐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화당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 데 이어 유럽연합(EU)의 주축인 독일도 ‘우향우’하는 것이다. 기민·기사 연합은 총리 선출에 필요한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력한 차기 총리로 떠오른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대표는 독일의 안보 체계를 개편하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번 총선 투표율은 약 83.5%로 1990년 통일 이후 최고치였다. 약 20.8% 득표율로 역대 최고 성적을 기록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52석으로 의석수를 크게 늘리며 제2당으로 올라섰다. 올라프 숄츠 현 총리가 이끄는 집권 사회민주당(16.41%·120석)과 녹색당(11.61%·85석), 좌파당(8.77%·64석)이 뒤를 이었다.
◇이민자 범죄·경제난에 지쳐… 독일 민심 ‘우향우’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는 24일 승리 소감을 밝히며 미국과의 관계 전환을 예고했다. 그는 이날 독일 공영방송 ARD에 출연해 “미국 정부는 유럽의 운명에 크게 무관심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절대적인 우선순위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화하고, 단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유럽을 사실상 배제한 채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 나서고, 유럽의 방위비 지출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유럽 안보 강화의 필요성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차기 정부는 이 밖에도 강력한 국경 통제, 이민자·난민 억제, 탈원전 취소 등의 정책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메르츠는 2022년 1월 당대표 취임 첫날부터 독일 전체 국경을 영구 통제하고 불법 입국 시도를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기민·기사연합이 내건 총선 핵심 공약도 ‘초강력 국경 통제’였다. 독일에서는 지난달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흉기를 휘둘러 두 살짜리 아이가 숨지는 등 최근 난민들의 강력 범죄가 이어지며 반(反)이민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도 반이민 정서를 등에 업고 2021년 총선의 두 배에 달하는 20.8% 득표율로 약진했다. 2013년 창당한 AfD는 2017년 13.3%를 득표하며 원내에 입성한 이후 이민자 추방 등 급진적인 정책으로 지지를 얻으며 독일 정치 지형을 흔들고 있다. 특히 옛 서독 지역과 여전히 경제적 격차가 큰 동독 지역에서 AfD에 대한 지지세가 높다.
차기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뒤엎고 원전 가동을 재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 정부가 급격한 탈원전과 친환경 정책을 병행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겹치면서 급격해진 에너지 비용 인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올라프 숄츠 현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은 2023~2024년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경제 침체에 이민·에너지 문제까지 겹쳐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2021년 총선에서 25.7%를 득표하며 1당으로 올라선 지 약 3년 5개월 만에 원내 3당으로 내려앉게 됐다. 숄츠는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라며 “선거 결과가 좋지 않았고,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기민·기사 연합은 차기 총리를 선출할 수 있는 과반(316석) 이상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연정 구성을 부활절인 오는 4월 20일까지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이다. 2021년 11.5%를 득표해 92석을 확보했던 자유민주당(FDP)이 원외로 밀려난 점이 변수로 꼽힌다. 우파 성향 FDP는 기민·기사 연합의 유력한 연정 파트너로 거론됐다. 그러나 이번엔 지역구 당선자를 내지 못했고, 비례 의석을 배정받기 위한 최저 득표율 기준인 5%도 넘지 못했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FDP 대표는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사민당(120석), 녹색당(85석) 등과 좌우 합작 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민·기사 연합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마르쿠스 죄더 기독사회당 대표가 녹색당과의 연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이어서 연정 협상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기민·기사 연합이 녹색당을 배제하고 사민당과 합작할 경우 328석으로 간신히 과반을 넘지만, 이념 차이가 커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기민·기사 연합을 포함한 기성 정당은 민주주의를 해친다는 이유로 AfD와의 연정 가능성에는 선을 긋고 있다.
한편 선거법 개혁안에 따라 현재 736석인 의석 수는 630석으로 조정됐다. 기존 독일 선거법은 정당 득표율보다 지역구 의석을 많이 확보하는 정당과 그렇지 못한 정당의 형평성을 위해 ‘보정 의석’을 추가로 배분했다. 이처럼 복잡한 선거 제도 때문에 전체 의석수가 과도하게 늘어난다는 지적에 따라 2023년 연방의회가 선거 제도를 단순화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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