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트럼프’로 불렸던 로드리고 두테르테(79) 전 필리핀 대통령이 11일 체포됐다. 소위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는 동안 무고한 시민 수만 명을 살해한 혐의다.
필리핀 대통령실은 이날 홍콩 방문 뒤 귀국하던 두테르테를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체포했다고 밝혔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인터폴을 통해 두테르테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고, 필리핀 당국은 이를 전달받아 집행했다.
AP통신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체포로 공항에서는 소란이 일었다. 두테르테의 변호사와 수행원들은 경찰에 큰 소리로 항의했고, 두테르테의 측근인 봉고 상원의원은 “이것은 그의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반발했다.
두테르테가 어디로 끌려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필리핀 정부는 두테르테가 현재 구금 상태이며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밝혔다.
지방 검사 출신인 두테르테는 1988년부터 28년 동안 필리핀 남부 다바오시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재판 절차도 없이 1000명 넘는 범죄자를 처형했다. 범죄 도시로 악명 높았던 이 도시의 범죄율은 크게 줄었고, 2016년 두테르테는 ‘6개월 내 범죄 근절’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출마했다. 상대 후보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자신의 말을 실행했다.
마약 복용자나 판매자가 곧바로 투항하지 않으면 경찰이 사살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취임 이후 약 한 달간 마약 사범 316명이 현장에서 사살됐다. 법 절차 없이 이뤄진 즉결 처형에 대한 반발도 나왔다. 필리핀 인권단체들은 무고한 시민을 처형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범죄자를 사살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필리핀 정부는 두테르테 재임 기간 약 6200명의 용의자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했다. 그러나 ICC는 1만2000~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도시 지역의 남성들이었으며 경찰이나 신원 불명의 인물에게 거리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두테르테는 ICC가 이 초법적 살해 혐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 2018년 ICC를 탈퇴했다. 이후 ICC가 정식 조사에 나서자 필리핀은 자체적으로 조사하겠다며 조사 유예를 신청했다.
그러나 ICC는 필리핀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며 2023년 조사 재개를 결정했다. 2022년 대선에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인 세라 두테르테 부통령과 러닝메이트를 이뤄 당선된 후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ICC의 조사를 거부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기 때문이다. ICC는 국가가 집단학살,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의 용의자를 기소할 의사가 없거나 기소할 능력이 없을 때 개입할 수 있다.
지난해 마르코스 대통령 측과 두테르테 측이 정치적 대립 관계로 돌아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마르코스 정부는 ICC가 인터폴을 통해 두테르테를 체포하려 할 경우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두테르테는 지난 9일 자신의 체포 영장 집행이 임박했다는 추측에 관해 “만약 이것이 정말 내 인생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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