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정장(正裝ㆍsuit)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저서와 이전 발언에서 “우리가 옷을 차려 입은 모습은, 우리가 말 한 마디도 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나에게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내가 처한 환경을 이해하고, 문화를 알아 이를 반영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트럼프에게 정장 차림은 또 집안 내력이기도 하다.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그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장을 입었고, 건설 공사장을 방문할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아들 트럼프도 이 관행을 따랐다. 심지어 올해 대학생이 된 셋째 아들 배런 트럼프(19)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세 아들도 모두 정장 차림을 좋아하고, 아버지 트럼프처럼 두껍게 넥타이를 맨다.
트럼프는 거의 항상 이탈리아제 최고급 정장인 브리오니(Brioni)와 넥타이를 착용한다. 브리오니사 제품은 미국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서 7900(약 1140만원)~1만2200달러(약 1770만원)에 팔린다. 트럼프는 자기 이름을 내건 정장 브랜드를 출시한 적도 있다.
심지어 집권 1기 매년 백악관에서 열리는 부활절 달걀 굴리기 행사에도 정장을 고수했다. 직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반면에 2024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에 모두 2억8800만 달러(약 4200억원)을 기부한 일론 머스크는 복장 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왔다.
머스크와 같은 실리콘 밸리의 IT 갑부들은 젊은 시절부터 기성 세대와는 달리 정장을 입지 않고, 자신들이 미국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임을 과시했다. 그들에게 티셔츠나 캐주얼한 복장은 패션(fashion)이 아니라, 메시지였다. 머스크도 주요 비즈니스 거래 자리가 아니면, 늘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그래서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행정부의 효율성을 높인다며,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야구 모자를 쓰고 짙은 색 피코트(peacoat) 외투를 풀어헤치고 ‘기술 지원(Tech Support)’이라고 가슴에 쓰인 티셔츠를 드러내고 백악관을 돌아다니자, 미 언론에선 이를 머스크의 새로운 메시지로 해석했다. ‘더 이상 백악관 방문객들이 따라야 할 복장 규정이란 것은 없다’ 쯤으로 읽혔다.
2월 26일 머스크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처음 열린 전체 각료회의에서도 트럼프 대통령과 장관들의 정장과는 대조적으로 이 복장으로 참석했다.
◇”젤렌스키의 밀리터리룩은 안 되고, 머스크의 티셔츠는 괜찮나”
그랬던 머스크가 3월4일 트럼프 대통령의 연방 상하원 합동연설과 3월6일의 두번째 전체 각료회의에는 넥타이에 깔끔한 맞춤 정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미국 언론은 2월28일 밀리터리 복장으로 백악관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복장 참사’를 꼽는다. 트럼프가 이날 젤렌스키를 맞으면서 그의 옷차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한 첫 마디는 “당신, 오늘 제대로 차려 입었네(You’re all dressed up)”였다. 분명히 조롱이 섞인 발언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날 공동 기자회견에서 J D 밴스 부통령으로부터 “미국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다”고 비판 받던 젤렌스키에게, 친(親)트럼프 우파 TV 케이블 매체 기자는 마지막 찬물을 끼얹는 질문을 했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왜 정장을 거부하느냐. 정장이 있기는 하느냐.”
며칠 뒤 백악관 대변인 캐롤라인 레빗은 브리핑 시간에 질문을 받았다. “젤렌스키가 정장을 입지 않아 행정부 관리들이 열 받았었는데, 일론 머스크는 여기서 한 번도 정장을 입은 적이 없다. 복장 규정이 뭐냐”는 것이었다.
미묘한 분위기 변화를 감지한 것일까. 머스크는 이후 두 번의 공식적인 행사에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머스크의 옷차림이 달라지자, 그 주 토요일(8일)의 풍자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는 “괴롭힘(bullying)은 여전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줬다”고 꼬집었다.
일론 머스크는 정장 차림으로 참석한 지난 6일의 두 번째 전체 각료회의에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미 국무부의 공무원 해고 건수를 놓고 설전을 벌였지만, 트럼프는 오히려 루비오를 두둔했다.
◇트럼프, 배꼽 드러나는 셔츠 입은 머스크에 “이 녀석은 뭐야?”
머스크의 티셔츠 복장을 보는 트럼프의 속내는 뭘까. 지난 2월 19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는 머스크와 함께 앉아 폭스뉴스와 인터뷰를 했다. 앵커는 트럼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사람들이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면서 ‘머스크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트럼프는 “실제로 일론이 전화를 했죠.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해요’라고 하길래, 내가 ‘그렇다’고 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람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일론 머스크에게 대통령 직을 양위했다’ ‘머스크 대통령이 오늘 밤 8시에 각료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어 “내가 멋진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해서 곧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머스크와 그 주변의 높은 IQ를 지닌 젊은이들이 연방 공무원들을 닦달하기 때문에 일이 처리되는 것”이라고 머스크를 두둔했다.
그러면서 머스크와 함께 일하는 젊은이들의 복장을 슬쩍 비꼬았다. 트럼프는 “그들[높은 IQ의 젊은이들]은 머스크보다도 훨씬 옷을 못 입는다. 그저 티셔츠만 입죠. 겉모양 봐서는 그들이 IQ 180인지 알 수 없을 거요”라며 웃었다. 이날 ‘테크 지원(Tech Support)’이란 티셔츠를 입고 나온 머스크는 “나는 그저 기술 지원팀”이라고 자세를 낮췄다.
트럼프는 당선인 시절인 작년 12월 펜실베이니아 주의 MAGA 집회에서도 머스크가 트럼프 승리를 축하해 무대에서 뛸 때 셔츠를 바지 속으로 넣지 않아 배꼽이 드러나자 “이 녀석은 뭐가 문제야(What the f--- is wrong with this guy?). 그리고 셔츠는 왜 안 맞는 거야?”라고 주변에 말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2022년 7월13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트루스소셜에 의미 있는 사진과 글을 남겼다. 당시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을 선언하기 전이었다.
일론 머스크가 자신의 집권 1기 때 정장 차림을 하고 백악관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에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트럼프는 이렇게 설명을 붙였다. “일론 머스크가 백악관에 와서 정부 보조금을 받는 자기의 많은 사업 프로젝트에 대해 도움을 요청할 때에는 – 그게 오래 달리지 못하는 전기차든, 충돌하는 자율주행 차든, 아무 데도 못 날아가는 로켓이든 – 보조금 없이는 그는 별 볼일 없지. 그가 나한테 자기가 엄청난 트럼프 팬이고 공화당원이라고 얘기한다면, 나는 아마 ‘무릎 꿇고 애원해’라고 말했을 테고, 아마 그는 그렇게 했을 거야.”
트럼프 주변 사람들은 세 아들뿐 아니라, 가족과 직장의 여성들까지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 입고, 좁고 높은 스틸레토(stiletto) 힐을 신는다. 워싱턴 포스트는 “따라서 트럼프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사람들을 타깃으로 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며 “트럼프 행정부에서 옷을 제대로 입지 않는 것은 반항(defiance)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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