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긴급 대국민 연설을 하는 모습. 그는 이날 연설에서 “프랑스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핵무기를 통한 전쟁 억지력을 통해 국가 안보를 지켜왔다”며 “프랑스가 보유한 핵 억지력에 대한 논의를 유럽 차원에서 확대할 의사가 있고 이를 통해 유럽의 안보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2기 출범 뒤 두드러지고 있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의 여파로 전후 80년간 지속돼온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이 흔들리자 유럽에서 ‘자체 핵무장론’이 분출하고 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 협상을 이끌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으면서 ‘미국을 못 믿겠으니 우리 스스로가 핵무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2차 대전 종전 후 줄곧 유지됐던 미국 중심의 핵군축 평화 기조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자체 핵무장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대표적인 나라는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이자 핵 비보유국인 독일이다. 지난달 총선에서 승리해 차기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는 지난 9일 인터뷰에서 “우리 유럽은 핵 억제력에서 함께 더 강해져야 하고, 이를 위해 핵무기 공유를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앞서 지난달 총선 승리 직후에도 “영국, 프랑스와 함께 핵 공유 혹은 핵 방위 적용을 논의해야 한다”며 ‘유럽 자체 핵 방위’를 처음 언급하기도 했다.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그동안 군사 정책에서 극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미국 및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과의 집단 안보에 의지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지난해에는 최초로 ‘국가 안보 전략’을 발표했고, 이제는 차기 지도자가 직접 ‘핵무장 필요성’을 언급하는 상황이 됐다. 기존 핵보유국과의 공유 형식이라고 전제했지만 독일에서 핵무장 주장이 나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래픽=박상훈

자체적으로 핵을 보유했지만 군축 기조에 맞춰 점진적으로 폐기해왔던 나라에서도 핵무장론은 불이 붙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유럽 핵우산’ 논의 주도를 시작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5일 연설을 통해 “프랑스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핵무기를 통한 전쟁 억지력을 통해 국가 안보를 지켜왔다”며 “프랑스가 보유한 핵 억지력에 대한 논의를 유럽 차원에서 확대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철저히 미국의 결정에 따랐던 기존 나토 핵 공유 시스템을 대신해 프랑스가 미국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 유럽 안보를 진두지휘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이다.

역시 핵보유국인 영국은 키어 스타머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가 군비 증강 주장에 대해 명확히 선을 긋고 있음에도 정치권에서는 자체 핵무장 논의가 분출하고 있다. 영국도 프랑스처럼 자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이참에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매닝 전 주미 대사 등 외교계 인사 네 명은 지난 5일 하원 국방위원회 청문회에서 “트럼프가 영국과의 핵 협력 협정을 끝낼 수도 있고, 미국의 약속이 너무 모호해져서 나토 상호 방위 조항이 더 이상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며 핵을 포함해 주도적인 군비 증강 계획 수립을 촉구했다.

독일의 이웃 폴란드에서도 핵무장론이 힘을 얻고 있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13일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에 폴란드 영토로 핵무기를 이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토 핵 공유 협정에 따라 미국은 유럽 방위를 위해 나토 회원국 일부에 전술 핵을 배치하고 있는데, 현재 벨기에·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튀르키예 5국에 제한적으로 배치된 핵무기를 폴란드까지 확대시켜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도날트 투스크 총리 역시 지난 7일 “러시아가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미국은 유럽 핵 안보 우산을 축소하고 있다”며 자국 내 핵 배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럽 주요국에서 핵무장론이 분출하고 있지만 실현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럽 핵무장 구상을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유럽 핵우산’의 범위에 폴란드나 발트 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등 동유럽까지 넣을지, 혹은 프랑스의 안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독일 등 인접 국가들만 넣을지 의견이 분분하다. 만일 후자로 방향이 정해질 경우 나토와 유럽연합(EU) 내 동·서유럽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이 기존 핵보유국을 중심으로 단일대오로 똘똘 뭉친다 해도 러시아와 비교가 되지 않는 전력상 열세도 자체 핵무장의 걸림돌이다. 프랑스는 약 290기의 핵탄두를 가지고 있으며 영국은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정도만 225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약 5600기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뉴욕타임스는 “모든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독일이나 폴란드 등에서 자체 핵무기 개발 논의가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이는 (핵 확산을 꺼리는) 미국의 나토 탈퇴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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