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1일 필리핀 정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79)에 대한 전격적인 체포와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압송은 이를 막으려는 두테르테 지지 세력과 시간을 다투는 긴박감 속에 진행됐다. 뉴욕타임스는 20일 필리핀 내무부와 경찰, 두테르테 측근들을 인용해 숨 막히게 진행됐던 이날 하루를 재구성했다.

15일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마닐라에서 그를 지지하는 기도 집회를 갖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이틀 전인 3월9일 두테르테 전 대통령(2016~2022년 재임)은 5월에 있을 필리핀 중간 선거를 겨냥해 홍콩의 사우던 스타디움에서 홍콩 거주 필리핀인들을 상대로 대규모 정치 집회를 가졌다. 이 선거에서 그는 자신이 22년 간 시장으로 재직했던 필리핀 제2의 도시 다바오의 시장 직에 다시 출마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필리핀에선 ICC에 반(反)인류 범죄로 기소된 두테르테가 ICC 회원국이 아닌 중국의 홍콩으로 망명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났다.

두테르테는 다바오 시장 시절부터 대통령을 마칠 때까지 경찰과 괴한들을 동원해 마약 사범 수천~수만 명을 재판 없이 약식 처형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가 퇴임한 뒤인 2022년 5월 필리핀 마약단속국은 6252명이 약식 처형 됐다고 발표했고, ICC와 유엔은 이보다 훨씬 많은 1만2000~3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마약 잡범이거나, 마약과 관계 없는 이들도 억울하게 많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비밀리에 발부된 ICC 체포영장

3월7일 두테르테가 홍콩에 도착하고 곧 ICC는 비밀리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이는 홍콩의 두테르테 측근들 안테나에 포착됐다. 두테르테의 동거 파트너인 하니렛 아방세나(55)와, 두테르테의 딸인 필리핀 부통령 사라 두테르테(46)는 두테르테의 마닐라 귀국 여부를 놓고 토의를 거듭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겉으론 평소의 허세를 과시했다. 9일 정치 집회에선 “ICC에 체포되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측근들은 두테르테가 3월11일 오후4시30분에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었다. 귀국 시간을 헷갈리게 하려고, 두테르테 측은 마닐라 귀국편 여객기 좌석을 서로 다른 시간으로 5개 예약했다. 그리고 도착하면, 바로 자신의 정치 근거지인 다바오로 갈 소형 제트기를 대기시켰다.

두테르테는 실제로는 이날 오전 9시30분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곧 억류됐고, 그날 밤 헤이그로 압송됐다.

◇현직 대통령도 함부로 건들 수 없었던 두테르테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난 수 세기동안, 아퀴노 ㆍ로하스ㆍ 에스트라다 등 불과 몇 개의 정치 가문이 정계를 장악해 왔다. 필리핀 북부의 마르코스 가문과 제2의 섬 민다나오를 중심으로 한 남부의 두테르테 가문도 그 중 하나였다. 이들 소수의 정치 가문이 의회의 70%를 차지한다.

1986년 2월 피플 파워 혁명으로 축출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는 두테르테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와의 ‘정치적 동맹’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사라 두테르테는 대통령 선거와 별개인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른바 마르코스ㆍ두테르테 가문의 정략적 동맹이었다.

따라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처음엔 전임 대통령 두테르테의 반인류 범죄에 대한 ICC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두테르테는 재임 중인 2019년 ICC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장관 인선을 둘러싸고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은 곧 반목했다. 사라 두테르테는 강력한 국방부 장관 겸직을 원했지만,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 받았다. 사라 두테르테는 내각에서 물러났다.

또 2024년 필리핀 의회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 시절 마약과의 전쟁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두테르테는 10월 의회 조사위원회에 나와 “나는 사과나 변명할 생각이 없으니, 내 정책을 묻지 말라. 나는 조국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반박했다.

결국 마크로스 주니어는 ICC의 체포를 기대하며, 유사 시 두테르테를 감금할 80쪽짜리 ‘추적 작전(Operation Pursuit)’을 세웠다. 헤이그에선 2월10일 ICC 검사들이 영장을 신청했다. 이 영장은 약 4주 뒤에 발부됐고, 필리핀 경찰당국은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을 통해 3월11일 이를 넘겨 받았다. 필리핀은 여전히 인터폴 회원국이었고, 이제 두테르테를 체포할 근거를 마련했다.

◇두테르테, 대통령 라운지에 앉아 체포 집행 거부

오전 9시 30분,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탄 캐세이 퍼시픽 항공 907편이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기내에서 휠체어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에게 한 경찰관이 “인터폴의 요청으로 ICC의 체포영장을 집행한다”고 통보했다. 두테르테는 “네가 백인 외국인들이랑 공모하겠다면, 날 먼저 죽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테르테는 이후 경찰 호송 버스로 마닐라 공항 인근의 빌라모르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예전에 자신이 외국 귀빈들을 맞았던 대통령 라운지에 앉았다. 두테르테의 변호사들은 그의 구속을 막으려고 필리핀 경찰이 피의자 권리를 읽어주는 것을 지연시켰고, 동거 파트너는 의사들이 헤이그 압송에 앞서 두테르테의 건강 상태를 검사하려는 것을 막았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헤이그로 압송되기에 앞서, ICC가 발부한 체포 영장을 보고 있다.

두테르테는 계속 ICC가 필리핀에서 사법권이 없다며, “필리핀 판사와 필리핀 검사가 필리핀 법원에서 나를 재판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했다.

두테르테는 재임 중인 2019년 ICC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ICC는 회원 탈퇴 전에 자행된 두테르테의 반(反)인류 범죄에 대해선 여전히 사법권이 있다는 주장을 편다. ICC는 두테르테가 다바오 시장이었던 2011년 11월부터 대통령이었던 2019년 3월까지의 범죄 사례들을 집중 조사했다.

빌라모르 공군기지 밖에는 두테르테 지지자들의 폭동을 막기 위해, 370명의 진압 경찰이 배치됐다.

한 경찰관이 두테르테를 공식 체포하자, 두테르테는 “너도 언젠가 은퇴할 것이고, 우리 애들이 너를 쫓아갈 것”이라고 협박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체포 공식 발표

두테르테가 마닐라 도착 90분 뒤, 마르코스 주니어는 말라카낭 대통령궁에서 그의 체포를 발표했다. 그러나 두테르테 측 지지자들은 그의 체포가 위헌(違憲)이라며, 업무 종료 직전에 대법원에 개입을 요청했다.

이제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면, 마르코스 주니어로선 가능한 한 빨리 두테르테를 헤이그행(行) 전세기에 태워 내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 전세기가 헤이그로 가기까지 영공을 통과해야 하는 국가들의 허가를 받는 데서 또 지연됐다. 첫번째 공역(空域)인 베트남은 3시간이 지나서야 승인했고, 오만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라마단으로 근무 시간을 단축해 또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두테르테는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앉는 대통령 의자에 앉아 쌀밥과 바비큐를 먹으며 코카콜라를 마셨다.

부통령인 딸 사라 두테르테가 밤 9시40분 빌라모르 공군기지에 도착해 아버지를 면회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사라 두테르테는 “아버지의 체포는 국가에 의해 자행된 납치’라고 주장했다.

필리핀 경찰 간부는 두테르테에게 “이제 내덜란드 행 비행기로 이동할 시간이 됐다. 내가 직접 몸을 써서라도, 당신을 비행기로 옮겨놓겠다”고 통보했다. 두테르테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고, 밤 11시3분 네덜란드행 전세기에 탑승했다. 의사 2명과 간호사 1명, 경찰관 3명, 두테르테의 전 비서관이 동승했다.

두테르테를 태운 전세기가 이륙하고 15분 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는 체포가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며 “우리는 인터폴의 요청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국제사회가 민주 국가인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 동맹의 붕괴 후 필리핀 정국은

사라 두테르테는 대통령에 출마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반해, 2022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아버지의 입김에서 독립적인 사라 두테르테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필리핀 대통령은 6년 단임제다.

딸 두테르테는 2028년 대선에선 마르코스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물론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도 퇴임 후 역풍을 사라 두테르테가 막아주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2022년 대통령에 취임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와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정치적 편의에 의한 두 가문의 동맹이었다.

그러나 마르코스 주니어는 축출된 독재자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에서 5년 간 지내고 펜실베이니아대 워튼 스쿨에서 공부한 친미(親美) 성향이었다. 집권 후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겪으면서 미국을 중국을 견제할 신뢰할 우방으로 봤다.

반대로 전임 두테르테는 미국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했고, 중국으로 외교 정책을 선회했다. 두테르테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자신의 “우상(idol)”이라고 불렀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두테르테를 “중국의 하수인”으로 비난했다.

결국 강력한 두 가문이 필리핀에서 권력을 ‘공유’할 방도는 없었다. 작년 말 마르코스 주니어가 장악한 필리핀 하원은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을 탄핵소추했다. 탄핵되면, 두테르테는 2028년 대선에 나설 수 없게 된다. 정치적 보복의 싹을 자르려는 조치였다. 하원의장은 마르코스 주니어의 사촌이다.

두테르테 가문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면서, 작년 11월 사라 두테르테는 자신이 살해될 경우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부부와 하원의장을 살해할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했다”고 공표했다. 사라 두테르테는 또 “(독재자) 마르코스의 시신을 파헤쳐서 서(西)필리핀해에 던져버리겠다”는 말도 했다.

마르코스와 두테르테 가문은 5월12일 중간 선거에서 정치 가문의 운명을 결정할 승부를 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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