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43일 동안 대부분의 정부가 4년 또는 8년 동안 달성한 것 보다 더 많은 성취를 이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4일 밤 연방 상하원 합동의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취임 63일 만에 103개의 행정 명령(executive order)을 내린 그는 정치·외교·통상·문화·스포츠 등 전 분야에서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에서는 이런 트럼프에 대해 ‘세계를 지탱해 온 동맹 관계를 파괴하고 돈만 밝히는 정치인’이라는 시각이 퍼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럼프는 혈맹(血盟)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를 거침없이 공언한다. 지난달 24일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하고 러시아·이란·북한 등과 한편이 됐다.
최인접 우방(友邦)인 멕시코·캐나다와 덴마크령(領) 그린란드 등에 대해선 고율 관세와 영토 장악 야욕(野慾)을 드러낸다. 반대로 ‘적(敵)’이라 스스로 규정한 중국에 대해선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대만 방어 의사 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트럼프가 동맹을 적전분열(敵前分裂)시켜 시진핑의 중국과 푸틴의 러시아만 이득을 본다는 관측도 나온다.
◇세계 질서 붕괴...中·러만 이득 챙겨?
미국·영국 등의 주류 엘리트 언론들은 “미국이 2차 세계대전 후 80년간 구축·유지해온 세계 질서를 트럼프가 수 십일만에 붕괴시켰다”고 지적한다. 이런 평가는 타당한가? 트럼프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올해 1월 20일 트럼프 2기 정부 출범후 지난 3개월을 돌아보면 ‘중국 압박’이라는 큰 흐름이 분명하다. 요란한 소음을 냈던 1기와 달리 이번에는 조용하고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보름째인 지난달 4일부터 모든 중국산 수입 제품에 10% 관세 부과를 적용했다. 이어 이번달 4일부터 10% 관세를 더했고 12일부터는 철강·알루미늄 등에 25% 관세를 매겼다.
◇취임 70일 만에 對中 관세 60%대
같은 달 24일엔 “베네수엘라의 석유·가스 등을 수입하는 국가의 제품에 다음달 2일부터 관세 25%를 추가 부과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의 가장 큰 표적(標的)은 베네수엘라 석유 최대 수입국인 중국이다.
트럼프 1기에 시작돼 바이든 정부에 유지된 기존 관세(15~30%)에 올해 2~3월 관세(10%+10%), 베네수엘라 석유 관세(25%)와 업종 관세까지 포함하면, 트럼프 2기 정부의 대(對)중국 관세는 대선 공약인 60%에 달한다. 일부 품목은 70%에 이른다.
미국은 하지만 자국을 상대로 많은 무역 흑자를 내는 일본·베트남·한국·대만은 물론 중국과 가장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선 국가별 관세 계획 언급 조차 않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국을 포위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中 포위 국가들에 국가별 관세 안 매겨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지난달 일본(7일), 인도(13일)와 정상회담을 원만하게 마쳤다. 두 나라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 즉 미국의 중국 봉쇄·억제에 꼭 필요한 핵심 국가이다. 한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트럼프에게 국방비 증액으로 화답하고 있다.
일본은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6% 수준인 방위비를 2027년까지 3%대로 높이기로 결정했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이달 13일 중국공산당을 ‘외국 적대 세력’으로 공식 규정했다. 이는 대만 민주화 이후 최초 사례이다. 올해 국방예산을 GDP 대비 3%로 올린 대만은 41년 만에 처음 한광(漢光)군사훈련을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해 벌인다.
“대만 해협 유사시에 대만을 방어하겠다”고 세 차례 밝힌 바이든 전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는 “나는 이 문제에 답하지 않겠다”며 함구하고 있다. 하지만 특유의 수사(修辭)와 카리스마로 그는 일본·대만 등의 반중(反中) 전선 적극 동참과 이를 위한 자주 국방 강화를 이끌어 냈다.
◇G7 외교장관, ‘하나의 중국’ 표현 처음 삭제
뿐 만 아니다. 이달 14일 캐나다에서 만난 G7 외교장관들은 회의 역사상 처음 공동성명에서 ‘하나의 중국(One China)’ 표현을 삭제하고 “대만이 적절한 국제기구에 의미있게 참여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트럼프의 미국이 중국의 숨통을 열어줘 더 키워주고 있다”는 일각의 시각과는 정반대 상황인 것이다.
트럼프가 멕시코와 캐나다, 파나마, 그린란드 등을 상대로 강경 대응을 하는 근본 배경에도 중국이 자리잡고 있다. 2023년부터 중국을 제치고 미국의 최대 수입국이 된 멕시코는 중국산 마약 ‘펜타닐’을 미국으로 공급하는 통로이자, 중국이 미국으로 우회 수출시 활용하는 가장 큰 ‘뒷문’이다.
멕시코를 경유한 중국의 대미(對美) 우회 수출은 실제로 2018년 53억달러에서 2022년 105억 5000만달러로 4년 만에 두배 늘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USMCA)으로 미국·멕시코·캐나다 3국간 무관세(無關稅) 교역을 하는 틈새를 노린 것이다.
파나마 문제의 원인은 파나마운하 내 항구 5곳 중 양쪽 끝 2곳(발보아·크리스토발)의 운영권을 중국공산당 정부 명령에 맹종하는 홍콩기업 CK 허치슨이 소유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의 압력으로 허치슨은 이달 미국 블랙록 자산운용 컨소시엄에 운영권 지분을 팔았다. 이로써 미국은 자국 컨테이너 총물동량의 40%가 오가는 파나마운하를 중국이 유사시에 통제할 수 있는 ‘안보 위험’을 제거했다.
◇멕시코·캐나다·파나마의 ‘親中化' 차단
총인구 400만명 중 중국계가 100만명에 이르는 파나마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 적극 협력해왔다. 이를 감안하면 트럼프의 본심은 파나마운하 강탈이 아니라 ‘미국의 앞마당’ 격인 파나마의 과도한 친중화(親中化) 차단에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린란드는 미국이 자국 방어를 위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조기 경보와 우주 감시에 가장 긴요한 전략적 요충지(要衝地)다.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국이 최근 군사·산업적으로 장악 움직임을 보이자, 트럼프 정부가 더 강한 맞불을 놓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캐나다에 대해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라”며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결정적 요인도 ‘중국’이다. 2015년 11월부터 9년 넘게 집권한 트뤼도 전 총리는 좌파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캐나다 총인구의 10%를 중국인과 이슬람이 차지할 정도로 인구가 늘고 중국 영향력이 커졌다.
주요 대도시 상권(商權)이 중국계와 중국 기업들에게 넘어가는 와중에, 캐나다는 펜타닐 마약의 미국 밀수출 통로 역할까지 하고 있다. 트럼프의 캐나다 때리기는 중국과의 협력을 줄이고 미국과 동질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회복하라는 권유와 압박이다.
◇후티 반군 공습 타겟은 배후에 있는 중국
이달 17일 트럼프 대통령이 예맨 후티 반군(叛軍)을 상대로 50여회 공습으로 역대급 군사 행동을 취한 것도 중동 분쟁의 실질적 배후(背後)인 중국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미국의 국력을 분산·소모시키기 위해 중국은 이란 석유 수출량의 90%를 사들이며 이란을 지원하고 있다. 이란은 다시 후티와 하마스·헤즈볼라 반군을 밀고 있는 ‘악(惡)의 고리’ 분쇄에 트럼프가 나선 것이다.
트럼프 정부와 나토 동맹국들이 최근 반목(反目)·균열(龜裂) 양상을 보이는데는 나토(NATO) 회원국들의 고질적인 ‘안보 무임승차(free riding)’를 빼놓을 수 없다. 나토 회원국들이 1947년 마셜 플랜 이후 80년 가까이 안보와 경제 모두 미국에 의존해 왔다고 보는 트럼프는 작년 8월 미국 국가방위군협회(NGAUS) 총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대신 ‘중국 억제’에 국력을 집중
GDP 대비 3% 정도 국방비를 쓰는 나토 회원국은 현재 폴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그리스 등 4국 뿐이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는 “나토 회원국들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국방은 물론 방위산업 투자까지 꺼려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파병할 30만명 병력은커녕 우크라이나 정전(停戰) 이후 안전보장에 필요한 3만~4만명의 평화유지군 조차 꾸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국력(GDP 기준)의 7% 수준인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매년 천문학적 전비(戰費)를 쓰는 것은 무의미하며, 최대 위협 국가인 중국 억제에 국력을 집중하는 게 옳다고 본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유럽 3개국 정권이 친(親)이슬람·반(反)기독교·반(反)남성백인주의 정책을 펴고 동성애·성 전환자 우대 같은 정치적 올바름주의(PC·Political Correctness)에 빠져있는 것도 트럼프 정부의 ‘탈(脫)나토’ 심리를 부추킨다.
◇서양 문명 본질적 가치서 멀어진 서유럽
지난달 14일 독일 뮌헨 유럽안보회의(MSC)에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내가 유럽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서양 문명의) 본질적인 가치(fundamental values)에서 후퇴한 유럽 내부로부터의 위협”이라고 말했다. 이는 서양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려는 트럼프 정부가 중국·이란 등 수정주의 국가들에 대해 유화적인 서유럽 정치 지도자들에 불만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정부가 해외 분쟁에 더이상 막대한 재정과 군사력을 투입하기 힘들어진 현실적인 사정도 작용한다. 미국의 어려움은 2015년 18조달러이던 국가부채(national debt)가 작년 11월 36조달러를 돌파해 9년 만에 두 배 정도 급증한데서 확인된다.
국가부채 이자(利子)로만 미국은 매일 25억~30억 달러 정도씩 지출하고 있다. 올해 국가부채 이자 비용만 1조 달러를 넘어 지난해 미국 총국방비(9680억 달러)를 웃돌 전망이다. 이런 형편에 미국이 유럽 방어를 혼자 책임지는 것은 자해(自害) 행위라는 것이다.
◇올해 국가부채용 利子가 국방비 추월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세계 경찰 역할을 해온 미국은 지금 엄청난 빚과 무역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렇게 분석했다.
“중국과 함께 세계 3대 강국(强國) 수준의 국력을 가진 EU는 자국 방위력 증강에 돈을 쓰지 않고 병력을 늘리지도 않으며 미국이 안보를 대신해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트럼프 정부는 파격적인 방법과 충격요법을 써서라도 이런 왜곡을 바로잡고 자국 경제 회복에 더 진력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4개 나토 회원국의 2024년도 GDP 합계(약 14조달러)는 러시아(세계 11위·2조달러)의 7배 정도다. 하지만 지난해 네 나라의 국방비 합계(2660억달러)는 러시아(1459억달러)의 1.8배에 불과하다. 나토 회원국들의 국방비 대폭 증액을 촉구하는 트럼프측 주장은 허황된 엄살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에 기초한다.
◇거친 공격적 言辭로 목표 달성한 트럼프
트럼프는 올들어 나토 동맹국들에게 전례없이 거친 언사(言辭)를 퍼부으면서 자신이 의도한 목표를 이루고 있다. 이달 19일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은 2030년까지 향후 5년간 8000억 유로(약1273조원) 이상을 투입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유럽 재무장(ReARM Europe Plan)’ 정책에 합의했다.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으로 이름 붙인 세계 30여개국 군사 고위 지도자들은 영국·프랑스 주도로 이달 20일 런던에서 모여 유럽군 창설 등을 논의했다. 영국, 스웨덴, 덴마크 등은 GDP 3%대로 국방비 증액을 잇따라 결정했다.
◇트럼프의 일관된 反中 노선, 한국도 영향권
말바꾸기와 좌충우돌을 일삼는 트럼프는 혼란스럽고 예측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차분하게 들여다 보면 그의 대외정책은 일관되고 집요하게 중국을 정조준하고 있다. 중국은 트럼프 정부의 국정(國政) 목표인 ‘강하고 안전하고 번영하는 미국’을 실질적으로 위협·방해하는 유일한 나라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마무리하는 대로 트럼프 정부는 ‘진짜 문제’(primary concern)인 중국 억제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면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한국도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들게 된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浮上)을 막는 첫 번째 관문은 대중(對中) 최전선(最前線)인 제1도련선 방어인데, 한국은 1도련선 안에 위치해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한국은 베이징으로부터 1000㎞ 거리에 미군 2만50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와 조선·반도체·원전·2차전지 제조업 경쟁력 같은 기정학(技政學)적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은 트럼프 정부와의 협상에서 이같은 특장(特長)을 십이분 활용해야 한다.
◇‘트럼프의 세계’를 오판하는 잘못
아울러 “트럼프가 중국·러시아와 손잡고 세계를 삼분(三分)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대만도 포기하고 중국에 오케이할 것”이라는 식으로 트럼프의 세계를 잘못 읽지 말아야 한다.
이런 오판(誤判)은 트럼프 특유의 공갈·과장·위장과 성동격서(聲東擊西)식 전법(戰法)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과민반응하거나 일희일비하는데서 촉발된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특이한 인간형에 집착할수록, 그가 구상하는 세계의 본질 파악은 힘들어진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게 최고 중의 최고(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는 <손자병법(孫子兵法)> 구절을 오래 전부터 실천하는 트럼프는 강력한 억제력으로 전쟁할 필요 조차 없는 ‘힘을 통한 평화’를 신봉한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정부는 중국 억제와 봉쇄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한국에 반중(反中) 전선 동참을 요구해올 공산이 크다.
이때 한국은 그에 ‘유용한 국가’와 ‘무관한 국가’ 중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우리가 후자(後者)를 선택한다면, 관세 폭탄과 주한미군 철수 또는 감축 같은 경제·안보 후폭풍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선린 관계를 유지하되 중국 눈치를 보느라 번영과 자강(自强)의 기회를 놓치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을 범해선 안 된다. 트럼프 2기 시대에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바로세우고 자유·인권의 확장이라는 세계사적 명제(命題)에 부합하는 결정과 행동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