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관세 협상을 시작한 일본이 쌀·자동차의 비관세 장벽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들어줄 수 있는 미국의 요청은 빠르게 검토해 다음 협상 때 ‘협상 카드’로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민감한 의제인 쌀의 수입량 확대를 검토하는 배경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협상에서 안보 문제를 거론하자, ‘안보는 관세 협상과 분리해야 한다’는 일본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로 보인다.
20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미국의 요구사항 가운데 우선순위가 높은 미국산 쌀과 자동차의 일본 판매량 확대를 위해 비관세 장벽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지난 16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일 관세협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협상 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에게 ‘일본에서 미국차가 팔리지 않는 건 이상하다’, ‘대일 무역 적자가 크다. ‘제로(0)’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이어서 진행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등과의 각료 협상에서도 쌀·소고기·감자 등 농산품과 자동차의 비관세 장벽이 주요 의제였다고 보도했다. 베선트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3월말 발표한 ‘외국무역장벽보고서’를 제시하며 “일본 쌀 시장은 규제가 엄격하고 불투명해 미국 수출업자의 일본 소비자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자동차 회사가 일본 시장에 진출할 때 불합리한 규제를 받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미국측 협상 대표단은 일본 측에 “결정하는 사람은 대통령”이라고도 했다.
일본은 연간 약 77만t의 쌀을 무관세로 수입하며 이 중 미국산이 45%를 차지한다. 연간 수입량을 넘는 쌀에는 약 280~400%(일본 측 주장, 미국은 700%라고 주장)의 관세를 부과한다. 무관세 수입량을 늘리면 자연스럽게 미국산 쌀의 수입량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그동안 쌀의 가격 유지와 농가 보호를 우선해 수입량 확대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작년 여름 이후, 쌀 공급량이 부족해 쌀 가격이 2배나 급등한 만큼, 쌀 수입량을 늘릴 여지가 있다고 보고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쌀 수입량 확대는 일본 농가의 반발을 부를 수 있어, 오는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둔 집권여당 자민당으로선 곤혹스런 선택이다.
미국산 자동차의 수입과 관련해선 형식 인증과 같은 시장 진입 규제를 간소화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현재 일본으로 수입되는 미국차는 원칙적으로 수개월 정도 걸리는 일본의 형식 인증을 받아야한다. 일본의 형식 인증은 시험 차량의 전면·측면 충돌시 탑승자의 안전 확보 등에 매우 세세한 데다 항목수가 많아, 미국은 ‘불합리한 진입장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닛케이는 “미국차가 미국에서 인증받은 평가 항목과 겹치는 상당수를 일본 형식 인증에서도 그대로 인정해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했다.
관세 협상의 양보안을 준비하는 일본의 고민은 자칫 미·일 관세 협상에서 안보 문제가 주요 의제로 등장할 가능성이다. 지난 16일 미일관세협상에 예정에 없이 등장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의 방위비 부담이 너무 적다고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19일 NHK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안전보장과 무역을 묶어서 논의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관세와 엮지 않는 형태로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야 다케시 외무상도 “만일 (지난번 관세협상에서)안전보장 문제가 나왔더라도 (관세 협상과는) 다른 트랙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사안의 성질이 본래 다르다”고 했다.
일본에선 ‘배려 예산’이라고 부르는 ‘주일미군 방위비 분담금’은 연간 2200억엔(약 2조2000억원) 정도다. 현재 일본은 2022년 회계연도(2022년4월~2023년 3월)부터 5년간 총 1조551억엔(약 10조5500억원)을 부담하기로 했고, 올해 예산은 2274억엔이다. 이 협정은 2027년 3월에 완료된다. 트럼프 1기 때도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 연간 80억 달러(약 11조4000억원)의 분담금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