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란 남부 반다르아바스의 샤히드 라자이 항구 폭발 사고의 여파가 커지고 있다. 사상자 규모는 1300여 명으로 급증했고, 이란 정부가 미사일 제조를 위해 수입한 중국산 화학물질이 폭발을 일으켰다는 정황이 전해지면서 민심도 악화하고 있다. 2020년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건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앞서 토요일이었던 26일 낮 12시쯤 항구의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약 50㎞ 떨어진 곳에서 폭발음이 들릴 만큼 강력했다. 항구에 쌓여 있던 2000여 개의 컨테이너가 불에 타거나 파괴됐고, 주변 차량과 건물도 부서졌다. 반경 수㎞의 건물 유리창이 깨졌다. 유독성 연기가 도시 전체로 퍼지면서 한때 학교와 사무실이 긴급 폐쇄됐고,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샤히드 라자이 항구는 연간 8000만t의 화물이 오가는 이란 최대 상업 항구다.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서 토요일은 한 주가 시작되는 날로 사고 당시 항구에 많은 직원이 근무하고 있어 인명 피해가 컸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이 항구는 특히 대표적인 석유 운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에 위치해 석유 정제와 수출을 위한 화학 시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당초 8명 사망, 750명 부상으로 알려졌던 인명 피해는 28일 40명 사망, 6명 실종, 1200여 명 부상으로 늘어났다. 사고가 발생한 날은 이란이 오만에서 미국과 3차 핵협상을 시작한 날이었다. 이 때문에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핵협상을 훼방 놓으려는 이스라엘의 공격”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란 정부는 테러나 군사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고 “화학물질을 제대로 보관 못 한 것이 원인”이라고 신속하게 발표했다. 이란 관영 IRNA 통신도 27일 “항구의 위험·화학물질 보관 지역에서 폭발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공개된 보안 카메라 영상에 따르면 컨테이너 한 곳에서 시작된 불이 다른 컨테이너로 빠르게 퍼지면서 불과 2분 만에 폭발이 일어났다. 이란 정부와 관영 매체들은 이곳에 어떤 화학물질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서 들여온 미사일 추진제 원료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식통을 인용해 “미사일용 고체 연료의 원료인 ‘과염소산나트륨’이 폭발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 매체 와이넷은 “올해 2월과 3월 중국에서 수입된 ‘과염소산암모늄’이 대거 보관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과염소산나트륨과 과염소산암모늄 모두 강력한 산화제로, 폭약과 미사일 추진제의 원료가 된다. 이란은 지난해 4월과 10월 이스라엘을 두 차례 공습하면서 총 300~400기에 달하는 탄도·순항미사일을 썼다. 이로 인해 미사일 상당수가 소진됐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 포기 압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란 핵시설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격 위협까지 가중되며 미사일 대량생산이 긴급한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이란이 중국에서 2000t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미사일 추진제 원료를 수입했는데, 일부가 땡볕에 방치되어 있다가 폭발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란 정부는 “당시 항구에 군사용 화물은 없었다”며 이 같은 보도를 계속 부인하고 있다.
이번 사고가 2020년 8월 레바논 베이루트의 대규모 폭발과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이 많다. 2013년 11월 조지아를 출발해 모잠비크로 향하던 몰도바 국적 선박에서 압류된 폭약 제조용 질산암모늄 2750t이 별다른 안전 조치 없이 베이루트항에 6년 넘게 방치되어 있다 폭발했다. 이 사고로 210여 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30여 만명이 이재민이 됐다. 항구 주요 시설이 파괴되면서 레바논 경제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사고로 인한 직접 손실만 150억달러(약 21조원) 이상으로 추산됐다.
사고 조사 과정에서 베이루트 항만청과 세관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정부에 질산암모늄 처리를 요청했다 묵살되는 등 레바논 정부의 무능·무책임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촉발된 반정부 시위로 당시 하산 디아브 총리 정부가 퇴진하는 등 후폭풍이 거셌다. 샤히드 라자이의 폭발 사고 역시 이란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영국 BBC 등은 “정부의 대응 혼선과 사고 원인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란 민심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며 “많은 이가 당국의 무능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