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정오 도쿄 북서쪽 최대 교통 중심지 이케부쿠로(池袋)의 세이부 백화점 본점. 건물 3동이 연결된 14층짜리 이 백화점은 ‘이케부쿠로의 군함(軍艦)’으로 불릴 정도로 거대한 규모지만, 매장 안은 의외로 조용했다. 하루 이용객 수가 전국 둘째로 많은 이케부쿠로역에서 연결되는 지하 1층 식품관이나 점심 도시락을 찾는 손님 십수 명이 매장을 둘러볼 뿐, 광활한 여성복 매장 코너에선 쇼핑객 한 명을 찾기 어려웠다. 점포가 철수해 비어 있는 매장도 눈에 띄었다. 사이타마현에서 왔다는 30대 여성은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오가며 들르기 좋지만 일부러 멀리에서 쇼핑하러 찾아올 만한 곳은 아니다”라며 “주말에도 지하 1층이 제일 붐빈다”고 했다.
세이부 백화점을 운영하는 일본의 유통 대기업 ‘세븐앤드아이홀딩스’는 최근 “성장 전망이 있는 사업에 집중하겠다”며 백화점 부문을 매각한다고 밝혔다. 편의점부터 백화점까지 고객의 모든 쇼핑을 책임지는 ‘종합 소매 그룹’을 지향하며 소고·세이부 백화점을 인수한 지 16년 만이다. 편의점에 비해 실적이 떨어지는 백화점 부문 매각을 주주들이 먼저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다른 백화점 업체들에 비해 유독 두드러지는 소고·세이부 백화점의 부진을 조명하며 “1억 총 중류(中流·중산층) 사회가 저무는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소고·세이부는 2000년대 초반 경영 부진에 시달리던 소고와 세이부가 합쳐져 생긴 브랜드다. 1990년대 초반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제히 부진에 빠진 일본 백화점 업체들이 라이벌과 뭉치던 시기였다. 소고와 세이부는 일본 백화점 업계의 후발 주자였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1970~1980년대 고도성장기 전국 지방 도시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는 특징을 공유했다. ‘일본 전 국민 1억명 모두가 중산층’이라는 자신감이 넘치고, 더 나은 것을 향한 욕망이 들끓던 시대 중산층을 겨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세이부는 스스로를 다수 중산층을 위한 ‘대중(大衆) 백화점’이라고 칭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소고·세이부는 소수의 부유층이 아닌 중간층을 차지하는 다수 대중의 (부에 대한) 동경과 욕망을 먹으며 성장했다”고도 했다.
이 같은 중산층 소비자를 겨냥한 전략은 1980년대까지 큰 성공을 거뒀다. 문제는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찾아왔다. 명품부터 식품까지 백화(百貨)를 한곳에 모아 팔며 소비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던 백화점이 경기 불황과 함께 외면받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위한 작은 사치’의 느낌으로 백화점을 찾던 중산층은 ‘싸고 좋은 것’을 찾아 교외 대형 마트나 유니클로, 이케아와 니토리,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을 찾았다. ‘중산층’에 집중한 소고·세이부가 다른 백화점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은 건 당연지사다.
일본 내 소비 양극화는 코로나 팬데믹 시국에 훨씬 심화됐다. 미쓰코시·이세탄, 다이마루 등 업계 전통의 강자들은 해외여행 대신 명품에 지갑을 여는 대도시 부유층에 기댔다. 미쓰코시·이세탄은 지난해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대중(중산층) 대신 개인(부유층)’을 내걸었을 정도다. 다이마루를 운영하는 제이프론트리테일 역시 매출 비중이 높아지는 럭셔리 브랜드와 미술·보석 매출에 집중하겠다며 “틀림없는 성장 전략”이라고 자신했다.
대도시 부유층을 잡지 못한 소고·세이부는 고전했다. 2020년 일본 전체 백화점 매출은 2008년의 58% 수준을 기록할 정도로 떨어진 게 사실이다. 미쓰코시·이세탄은 57%, 다카시야마는 65%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소고·세이부의 부침은 더 두드러진다. 이들의 2020년 매출은 2008년의 42% 수준이다. 부유층 고객을 확보하지 못한 지방 중소 도시 백화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20년 7월 야마가타현 사카타시의 지역 백화점 오누마가 폐점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백화점이 하나도 없는 현(縣)’이 생겼다. 한 달 뒤 도쿠시마현 내 소고 백화점이 문을 닫으며 두 번째 사례가 생겼다.
패션 전문 업체 WWD는 “일본 백화점 업계에서는 ‘어퍼 미들(upper middle)’ 시장이 사라졌다”며 백화점 시장의 양극화가 코로나로 10년은 더 빠르게 진행됐다고 진단했다. “서방 국가나 한국이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동안 일본은 선진국에서 임금이 가장 싼 나라가 됐다. 반면 사회보험료 부담 증가로 가처분소득은 줄어들었다. 백화점 소비를 즐길 사람도 줄었다”는 진단이다. 실제 후생노동성의 국민생활 기초조사에 따르면 일본 가구의 중위 소득은 1995년 550만엔(약 5724만원)에 달했지만, 2018년엔 437만엔으로 줄었다. 2010년대 ‘아베노믹스’에 따른 인위적인 엔저 유도 정책으로 일반 소비자들이 느끼는 아이폰 등 해외 브랜드 제품의 체감 가격은 더욱 오르는 실정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소고·세이부의 부진은 결국 일본 사회의 부침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중산층이 소비 여력을 잃자, 중산층의 욕망을 먹고 자라던 ‘대중 백화점’의 기세도 꺾였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