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5
방구석 도쿄통신 본 회차엔 과거 일본에서 벌어진 살인 등 강력 범죄에 대한 묘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일본엔 2023년 12월 시작된 ‘심정 등 전달 제도’가 있습니다. 교도소 등 형사 시설에 수감 중인 가해자에게 피해자나 그 가족, 혹은 유족이 자신의 ‘심정’을 전할 수 있는 제도죠. 희망자에 한해 가해자를 맘껏 책망하거나, 솔직한 범죄 동기를 물어 피해자들이 하루라도 일찍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제도가 개시되고 1년 지난 작년 12월까지 총 136건의 신청이 접수됐다고 합니다. 생명·신체범(살인 등)이 35건, 교통사범이 31건, 재산범이 34건, 성범죄가 17건, 기타 19건이었습니다.
가나가와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와타나베 타모츠(渡邉保·76)씨는 이 제도를 두 번 이용했습니다. 제도 이용에 횟수 제한은 없습니다.
와타나베씨는 25년 전 살인 사건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스물두 살 딸을 잃었습니다. 야후뉴스에 따르면 가해자는 그의 중학교 동창으로, 귀갓길 피해자를 차량에 태워 농지로 끌고 가 칼로 목을 찔러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2003년 자수했고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피고는 상고했으나 법원이 기각했습니다.
NHK·마이니치 등에 따르면, 판결 당시 법정에 선 가해자는 와타나베씨를 비롯한 유족들에게 “너희가 데리러 오지 않았으니 그녀가 죽은 것”이라는 망언을 쏟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아내는 트라우마를 호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와타나베씨는 제도에 대한 소식을 들은 직후까진 이를 이용할 의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야후뉴스에 “상대가 상대이니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체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사건으로부터 20년 넘게 지나 ‘가해자도 반성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와타나베씨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지난해 6월 제도 이용을 위해 교도소로 향했다고 합니다.
교도소 내 좁은 방에서 교도관을 만나, 한 시간 반에 걸쳐 20년이 넘도록 잊히지 않은 딸에 대한 사무침을 쏟아냈습니다. 교도관은 그에게서 들은 내용을 서면으로 작성했고, 이후 가해자에게 대리로 읽어주는 방식으로 와타나베씨의 ‘심정’을 전달했습니다.
이듬달 와타나베씨에게 ‘심정 등 전달 결과 통지서’가 도착했습니다. 당시 통지서를 받는 와타나베씨를 언론 카메라들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가해자의 ‘답변’을 읽은 와타나베씨 표정이 이내 굳더니, 그의 입에서 “장난치지 말라고…”란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후에 “가해자가 반성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아주 조금이나마 기대했지만,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고 했습니다.
가해자 편지엔 뭐라고 적혀 있던 걸까요. 통지서를 받고 수달이 지나 일본 취재진과 다시 만난 그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만 몇 가지 기억에 남은 답변들을 말했습니다.
가해자는 ‘재판 중 무죄를 주장했는데 지금은 어떻냐’는 와타나베씨 질문에 “재심 청구가 모두 기각됐으니 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 더 싸워서 뭐하겠느냐”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어떤 생각으로 교도소에서 생활하고 있느냐’는 물음엔 “과거의 일은 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단 생각이다”란 답이 적혀 있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울컥 화가 났어요. 과거의 일을 잊고 지금을 살고 싶다니,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느니… ‘너에게 다시 시작할 인생 따윈 없어’라고 생각하며 읽었어요.”
이후 겨우 감정을 추스른 와타나베씨는 지난해 8월 두 번째 제도 이용에 나섰습니다. 범행 계획성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힘겨운 삶을 살고 있어. 너는 감옥 안에서 죽게 될 거고, 과거의 일을 절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을 거야.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분노 어린 질문을 가해자 측에 보냈습니다.
이듬달 돌아온 답변은 첫 번째보다도 추악했습니다. “타모츠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와는 관계없어. 난 과거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거야. 내가 자기중심적인 것 같다면 마음대로 생각해.” “이런 걸(편지를 주고받는 것) 몇 번이나 할 순 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일부러 방해하는 꼴이잖아. 이상한 편지를 보내 사람을 괴롭히고 있어.” “날 미워해도 어쩔 수 없어. 사람을 미워하면 좌절이나 절망밖에 생기지 않아.” “다신 편지를 쓰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
와타나베씨가 가장 듣고 싶었던 범행 계획성에 대해서도 “목적은 없다. 우연히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 질문이라면 변호사에게서도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며 과거 법정에서의 주장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일본 법무성 내부에선 제도 개시 전 와타나베씨와 같은, 피해자를 위로하기보다 상처에 더 소금을 뿌리는 식의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단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와타나베씨는 세 번째 제도 이용을 준비하고 있다고 야후뉴스가 전했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범죄 피해자들의 답답함 중 하나가 교도관, 보호관찰관 등 교정 시설 종사자들이 각 수용자가 저지른 범죄의 정도, 피해자의 고통을 잘 알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부 유족들은 교정 시설 종사자라면 가해자가 어떤 인물이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여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살인 사건 유족 중 한 명이 ‘심정 등 전달 제도’가 탄생하는 데 주춧돌이 됐습니다. 오사카 가와치나가노시에 사는 오쿠보 이와오(大久保巌·60)씨입니다. 16년 전 열다섯 살 둘째 아들이 열일곱 살 소년에 살해됐습니다. 오쿠보씨 아들의 여자친구가 본인의 접근을 거부했단 이유에서였습니다. 방망이로 머리를 난타당해 즉사,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가해 소년은 당시 법정에서 웃음을 보이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겐 징역 5년 이상 10년 이하라는 부정기형(不定期刑)이 내려졌습니다. 소년법에 따른 것으로, 당시 재판장이 판결문에 “10년 징역형은 충분치 않다. 소년법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이례적인 부언을 남기면서 일본 전역에 화제가 됐었습니다.
가해 소년이 구금된 후, 오쿠보씨는 그가 수감된 형무소 형무관과 가석방 심사에 관여하는 갱생보호위원회 위원들과의 면회를 수차례 희망했다고 합니다. 가해자와 관련한 이들이 피해자인 자신의 아들이 어떤 사건을 당했고, 가해 소년은 어떤 소년이었으며, 법정에서 얼마나 추악한 일이 있었는지 알아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당시까지 범죄 피해자의 유족이 교도관에게 심정을 전하려 한 전례는 없었다고 야후뉴스는 보도했습니다. 법무성 견해는 ‘제도는 없지만 할 수 없다는 규칙도 없다’는 것. 결국 현장 재량에 맡겼고, 수개월이 지나 보호관찰소와의 면담이 성사됐습니다.
현재 가해 소년은 출소한 상태입니다. 오쿠보씨는 그와의 만남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가해자에게 답을 달라고 요구해도 소용없어요. 어떠한 답이 돌아와도 제겐 부족할 테니까요.” 그는 2023년 신설된 제도에 대해 “교도소나 보호관찰소, 갱생보호위원회 등 (교정) 관계 기관에 사건의 내용과 유족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음은 (좋게) 평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 주 다시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73~74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하청’이란 말 이제 못 쓴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5/01/22/W3J5BQUN6RCQTGADUCXF5JOHCE/
“물려받을 후계자 없어” 日 중소기업 비명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5/01/29/5TWTYO4Z4NEHPLHSO2DAZV2SEY/
‘방구석 도쿄통신’은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하단의 ‘구독’ 링크를 눌러주세요. 이메일 주소로 ‘총알 배송’됩니다.
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