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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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입니다. 최근 일본에선 고교 수업료 무상화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사실 내각 추진의 고교 무상화 정책은 이미 실행되기로 확정됐습니다. 집권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 연립여당 공명당의 사이토 데츠오 대표, 야당 일본유신회 대표이자 오사카 지사인 요시무라 히로후미가 지난달 국회에서 만나 올 4월부터 공·사립을 불문하고 모든 고교생에게 연간 11만8000엔(약 116만원)의 취학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예산안 합의안에 서명했고요. 나아가 내년 4월부터 사립고를 대상으로 했던 취학 지원금 상한액 소득 제한을 폐지하고, 그 지원금을 현행 연 39만6000엔에서 전국 평균 사립고 수업료에 해당하는 45만7000엔으로 인상하기로 했습니다.
자민당은 이번 예산안 통과를 위해 과거 경쟁 상대였던 오사카 등 간사이(關西·관서) 지방을 거점으로 하는 일본유신회와 손을 잡는 선택을 했습니다. 고교 무상화 정책은 자민당이 아닌 일본유신회의 지난해 10월 중의원 총선 공약이었죠. 여당은 이를 위해 교육 관련 예산을 1064억엔 증액해야 했습니다. 일본유신회가 자민·공명당으로 이뤄진 연립여당에 합류할 수 있다는 전망도 현지 정계에선 나옵니다. 현재 일본 중의원은 연립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여소야대 상태입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국민 여론이 밝을 것만 같은 고교 무상화 정책이 최근 찬반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앞서 일본에서 벌어진 ‘고교 무상화의 역설’ 현상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일본 제2 도시 오사카 당국은 일찍이 2010년부터 자체 고교 무상화 정책을 실행해 왔습니다. 그런 오사카에서 확연히 벌어지고 있는 부작용이 ‘공립 기피’ 현상입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지난 9일, 이번 달 실시되는 고교 일반 입시에서 오사카 내 전일제 공립고 128교 중 과반인 65교가 정원 미달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오사카 남부 한난시(阪南市)에 있는 지역 유일 공립고, 49년 역사의 이즈미톳토리(泉鳥取)고는 수년째 거듭된 정원 미달에 이달 폐교하게 됐어요.
하시모토 토시카즈 이즈미톳토리고 교장은 NHK에 “공립과 사립고는 (운영) 자유도나 예산이 크게 달라 시설적으로도 차이가 크다”고 했습니다. 시설이나 교육 환경 측면에서 공립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사립고로 학생들의 발길이 몰려 공립고가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입니다.
하시모토 교장은 이어 “(고교) 무상화로 인해 본교처럼 폐교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공교육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호소했습니다. 조코 마코토 한난시 시장도 “어린아이들이 참가하는 지역 문화 활동이나 관광 사업이 사라지게 됐다. 공립고가 하나둘씩 사라지면 지역 활성화와도 거리가 멀어진다. 오사카 당국에 (고교 무상화 정책) 존속 논의를 요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NHK에 따르면 최근 내각 차원의 고교 무상화 정책이 확정되면서, 가나가와현 등 일부 지역에선 벌써 공립에서 사립으로 아이를 전학시키고 싶다는 학부모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 오사카에 이어, 올해부터 사립고 취학 지원금 소득 제한을 철폐해 수업료를 자체 무상화한 도쿄에선 중학교들을 대상으로 사립고 진학을 위한 수험반 개설 요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고교 무상화의 진짜 수혜 대상은 빈곤층이 아닌 부유층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번 이시바 내각의 고교 무상화는 취학 지원금 소득 제한을 철폐하는 방식. 즉 수업료를 ‘실질적으로’ 면제해주겠단 것인데, 이는 수업료를 ‘안 내도 된다’는 것이 아닌 ‘낸 뒤에 돌려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일종의 캐시백인데요.
주간지 SPA!에 따르면, 일본 대부분 학교는 수업료를 연초에 납부하게 해서, 취학 지원금이 들어오는 약 8개월의 기간 동안은 평균 수업료 기준 40만엔가량을 잃어야 합니다. 금전적으로 빠듯한 가정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거죠.
나아가 부유한 가정에선 이렇게 ‘세이브’한 돈으로 아이를 비싼 학원에 보내거나 해외 유학을 시키는 경우가 늘어나서, 경제 수준에 따른 학력 격차가 확대할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SPA!는 “‘지불할 필요가 없다’와 ‘지불하고 돌려받는다’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결국 고교 수업료가 무상화되어도 실질적인 지원을 받는 건 부유한 가정에 국한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달 경제학자 4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70%가 취학 지원금을 사립고 평균 수업료 수준으로 인상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했습니다. 코니시 요시후미 게이오대 교수는 “사립고와 학원의 수업료 급등, 수험 경쟁의 추가적인 과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토 모토히로 히토츠바시대 교수는 “고교 무상화로 여유가 생긴 돈을 학원비 등 다른 교육비로 지출하려는 움직임이 예상된다. 본래 의도한 가계 지원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 주 다시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78~79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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