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지난달 15일 일본 고속 열차 신칸센에서 주최된 프로레슬링 경기 장면.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사상 달리는 열차에서 경기가 열리는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후지TV 유튜브

“신칸센을 박살 내는 거야, 가자!” “덤벼, 여행 가방 어택!”

지난달 15일 일본 도쿄에서 출발한 오사카행(行) 신칸센 노조미(のぞみ). 시속 285㎞로 달리는 이 고속 열차에서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습니다. 와타나베 미우, 미즈키, 아자콩, 야마시타 미유 등 현세대 최고 인기 선수들이 총출동한 여자 프로레슬링 경기가 주최된 것입니다.

선수들은 열차가 정차할 때 승강장에서 새로운 무기를 들고 등장하는 등 특수한 공간을 활용한 엔터테인먼트 요소들을 선보였습니다.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역사상 신칸센에서 경기가 열린 건 이날이 처음이었습니다.

TV아사히에 따르면, 이날 신칸센 경기 입장권 값은 장당 최고 6만엔(약 58만원). 그럼에도 전 좌석(70석)이 판매 개시 2시간 만에 매진됐다고 합니다.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단체 '스타덤(STARDOM)' 선수 단체 사진/bushiroad-music.com

쇼와 시대(1926~1989) 공전의 히트였던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이 ‘역주행’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NHK는 지난 12일, 여자 선수 40여 명이 소속된 프로레슬링 단체 ‘스타덤’이 최근 연간 매출 15억엔(약 147억원)을 기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5년 전과 비교해 7배 뛴 것으로, 재작년 무렵까지 매출 부진에 선수 이탈이 이어졌던 것과는 대비되는 일이라고 현지 매체들이 전했습니다.

스타덤을 비롯해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는 여자 프로레슬링 단체는 14곳으로 인기가 최절정이었던 1980년대(2곳)보다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들은 신칸센 경기처럼 이색 경기를 기획하는 것은 물론 편의점·화장품 등 각종 기업과 협업한 상품을 내놓으며 홍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 가부키초의 공연장 신주쿠페이스에서 지난해 9월 열린 여자 프로 레슬링 경기 장면/프로 레슬링 단체 PPP도쿄

여자 프로레슬링 단체 ‘마리골드’는 지난달 선수들의 일대기와 사진을 담은 화보집을 발간했고, 오는 20일 도쿄 도시마구에서 출판 기념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여배우 출신들로 구성된 ‘액트레스 걸즈’는 지난 14일 공식 팬클럽을 처음 열었습니다.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은 1948년 도쿄 미타카시의 한 소규모 체육관에서 전후(戰後) 일본에 주둔하던 미국 등 연합군 병사들을 상대로 상연한 여자 레슬링 대회를 시초로 합니다. 재일한국계 역도산(1924~1963)을 대표로 하는 남자 프로레슬링(1953~)보다도 역사가 깁니다.

일본 도쿄 분쿄구 코라쿠켄홀에서 지난해 6월 열린 여자 프로 레슬링 경기 장면/쓰레드

1968년 공식 리그인 전일본여자프로레슬링이 출범한 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번영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요코하마 아레나 등 당시 건설된 대규모 공연장들은 여자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릴 때마다 관객들로 만석(滿席)을 이뤘다고 합니다.

여자 선수 특유의 유연하고 날쌘 동작, 나아가 성별 역할 의식이 확연했던 당시 드물게 여성만으로 구성된 스포츠였다는 점 등이 선풍적인 인기의 비결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남성 경기에 비해 선수 간 대립과 우정, 성장 스토리가 두드러진단 점도 ‘장수 팬층’을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지난해 8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일본 드라마 ‘극악여왕’의 한 장면. 1980년대 여자 프로레슬링팀 극악동맹 리더 ‘덤프 마츠모토(왼쪽)’의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넷플릭스

하지만 전일본여자프로레슬링이 1997년 ‘버블 경제’ 붕괴의 여파로 부도를 맞으며 여자 프로레슬링은 수십년 간의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사실상 인기가 저문 아이돌 등 연예인들의 피난처로 전락했다는 평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를 극복하고 최근 다시금 인기를 끌어올린 공신으론 지난해 8월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극악여왕(極惡女王)’이 꼽힙니다.

드라마 극악여왕은 1980년대 죽도와 사슬 따위를 들고 난폭한 퍼포먼스를 벌여 ‘최고의 악역’이라고 불렸던 프로레슬링팀 ‘극악동맹’ 리더 ‘덤프 마츠모토’의 실화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쇼와 시대 만연했던 폭언과 구타, 성희롱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겼는데도 현지 넷플릭스 TV쇼 부문 시청률 1위에 오르는 등 흥행했습니다.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번영했던 쇼와 시절의 추억을 자극했다는 평입니다.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선수 '덤프 마츠모토(노란 옷)'와 그가 이끄는 팀 선수들/battle-news.com

이러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먼지만 날렸던 여자 프로레슬링 경기장에 관객들의 발길이 다시 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NHK는 미국 등 해외에서도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실제 경기를 직관하기 위해 일본을 찾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여배우·아이돌·교사 등 출신을 불문한 신인들이 너도나도 도전장을 내밀고도 있습니다.

현지의 한 여자 프로레슬링 팬은 “여자 프로레슬링은 단순 스포츠를 넘어 사회에 억압된 (일본 여성들의) 피로를 해소시켜준다”고 했습니다. 스타덤의 사장 오카다 타로는 NHK에 “우리 종목은 관객들이 사회에서 숨겨 온 분노 같은 감정들을 선수에게 이입해 분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했습니다.

'도쿄 타워'가 보이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전경/조선일보DB

다음 주 다시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79~80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갓 짜낸 니혼슈, 시속 300㎞ 고속 열차 타고 달린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5/03/05/R3FWKRZ6BBCI7G5J2XPHXUQH5U/

고교 무상화의 역설, 동네 유일의 공립고가 폐교했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5/03/12/HKDAYDXX7NF5VPUIV5JLNSUNTI/

현해탄 건너 당신이 궁금해 할 일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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