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최대 야당인 입헌민주당이 글로벌 관세 전쟁을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보고 집권 여당에 대한 정치 공세를 중단하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에 부과한 24% 상호 관세로 경제적 타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이시바 시게루 내각을 흔들기보다는 여당과 협력해 국난(國難)을 함께 넘어가겠다는 것이다.
10일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노다 요시히코 입헌민주당 대표는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가능한 한 빨리 미국에 가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만나야 한다”며 “우선순위는 (정치자금 스캔들이 아닌) 관세 문제”라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의 최측근인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최근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담당할 각료로 지명됐다.
류 히로후미 입헌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도 “관세 문제는 국난이라 할 만한 중대한 사태”라며 “이 문제엔 여당도 야당도 없으며 협력할 부분은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은 “입헌민주당이 국난 앞에서 현재 정치 쟁점인 ‘정치자금 스캔들’을 접어두고 휴전을 택했다”고 보도했다.
◇日 야당, 이시바의 상품권 스캔들 공세도 중단
사실 입헌민주당으로선 지금이 이시바 시게루 내각을 흔들 절호의 기회다. 이시바 내각은 국민 지지율이 20~30%에 불과한 데다 자민당 내에도 반대파가 적지 않은 허약한 정권이다. 여기에 이시바 총리는 지난달 자민당 초선 의원 15명에게 각각 10만엔(약 99만원)어치 상품권을 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강점이었던 청렴 이미지마저 깨지고 퇴진 위기에 내몰렸다.
오는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입헌민주당은 다른 야당들과 선거 연대를 추진하고 있다. 작년 10월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 자민당·공명당 연합의 과반 의석을 무너뜨린 입헌민주당 입장에선 이시바 총리의 상품권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면서 참의원 선거까지 승리로 이끄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인 셈이다.
입헌민주당의 입장 선회는 선의(善意)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당리당략에만 매몰됐다간 ‘관세 전쟁’에 내몰린 국민이 비판의 화살을 야당에 돌릴지 모른다는 계산도 없지 않다. 입헌민주당의 한 간부는 아사히신문에 “국민 생활을 직격할 관세 문제가 터진 상황에서 ‘정치 자금 문제’에만 매몰되는 야당이란 인식이 퍼지는 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야당들도 정치 공세를 자제하고 자민당의 이시바 내각과 관세 문제에 공동 대응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4일 이시바 총리가 긴급 제안한 ‘초당파 협의’에는 연립 여당의 일원인 공명당은 물론 입헌민주당·일본유신회·국민민주당·일본공산당·레이와신센구미 등 주요 야당 대표 전원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선 정치 논쟁은 없었고 ‘협상 전면에 총리가 나서고 모든 부처가 관세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 ‘취약한 하청 중소기업을 먼저 챙겨야 한다’ 같은 대책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초당파 협의 직후 실제로 이시바 내각은 모든 각료(장관)가 참여하는 종합대책본부를 설치했다. 또 관세의 직격탄을 맞게 될 하청 중소기업에 무담보·무이자 대출을 해주는 ‘제로·제로 융자’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인 여야가 관세 대응에 있어서만큼은 한 팀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미국이 9일 상호 관세를 90일 유예한 데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이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10일 “앞으로 발표될 세부 사항을 잘 살필 것”이라며 “상호 관세와 자동차 관세 등에 대해 계속해서 미국에 재검토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립 여당인 자민당·공명당 내부에선 상호 관세가 실제 단행될 경우에 대비해 전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상호 관세 탓에 물가가 급격히 오르면 현금을 줘서라도 국민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1인당 3만~10만엔(약 99만원)을 주는 방안이다. 다만 일회성인 데다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판도 있는 만큼, 오는 6월 국회에서 야당과 협의해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