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로 숨진 핵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를 추모하는 이란인들의 집회./로이터 연합뉴스

27일(현지 시각) 낮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소도시 아브사르드. 이란 핵 개발을 주도해온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59)가 타고 가던 승용차의 바로 옆을 지나던 트럭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승용차는 즉시 멈췄고, 갑자기 대여섯 명의 총잡이가 나타나 승용차를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파크리자데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료진이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숨졌다.

이란 정부는 즉시 이스라엘 소행으로 간주하고 보복을 다짐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28일 “다시 한번 시오니스트 정권(이스라엘)의 사악한 손에 이 나라 아들의 피가 묻었다”고 했다.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도 “범죄자와 잔인한 용병들의 손에 순교한 우리 핵 과학자를 위해 가해자를 처벌하라”고 했다. 모하마드 바게리 이란군 참모총장은 “엄중한 복수”를 다짐했다. 이스라엘은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지만 주요 외신들은 이스라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이란 사법부 수장인 아야톨라 에브라힘 라이시(가운데 가운 입은 사람)가 28일(현지 시각) 전날 테러로 사망한 이란 핵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의 시신이 놓인 수도 테헤란의 임시 안치소를 찾아 애도를 표하고 있다. 라이시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파크리자데의 유족들이 포함돼 있다. /AP 연합뉴스

숨진 파크리자데는 1999년부터 4년간 진행된 ‘아마다 플랜’이라는 이란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지휘한 핵심 브레인이다. 이란 물리학연구센터(PHRC) 소장을 지냈다. 2011년 유엔 보고서는 이란이 핵무기 기술 획득을 위해 노력한 주도적인 인물로 그를 지목했고, 이란과 가장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도 그를 오래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눈여겨봤다.

이 사건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에서 승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발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노골적인 ‘친(親)이스라엘·반(反)이란’ 정책을 펴왔다. 반면 바이든은 2015년 오바마 행정부 때 체결했다가 트럼프가 파기한 이란 핵 합의를 복원시키겠다는 방침을 밝혀왔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가장 든든한 우군인 미국이 이란에 보다 가까워진다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바이든 당선 후 공개적으로 “이란의 핵 합의 복귀를 반대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트럼프 퇴장이 예고됨에 따라 이스라엘이 서둘러 파크리자데를 암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도 28일 “(암살의) 진정한 목적은 (바이든) 당선인이 이란과 외교를 재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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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은 지난 9월 CNN을 통해 공개한 기고문에서 “이란이 핵무기를 획득하는 것을 막겠다”며 그 해법으로 ‘외교’를 제시했다. 바이든은 “만약 이란이 핵 합의를 다시 엄격하게 준수한다면 미국은 추가 협상의 시작점으로서 합의에 다시 참여할 것”이라고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타결된 미·영·프·독·중·러와 이란 간의 핵 합의인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을 파기하자, 이란도 합의 준수 의무가 사라졌다며 우라늄 농축 농도와 양을 늘려왔다. 이를 다시 합의 당시 수준으로 되돌리면 미국도 이 합의를 복원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번 사건은 이런 바이든의 ‘중동 정책 구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란이 이번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도발에 나서면 중동 정세가 요동치게 되고, 이란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악화하면서 바이든이 취임 후 대이란 외교를 시작하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 이란은 이미 복수를 다짐했고, 이스라엘은 해외의 자국 대사관에 최고 수준의 경계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만약 이란이 보복하면 트럼프가 내년 1월 퇴임 전에 반격을 가할 구실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신문은 트럼프가 지난 12일 백악관 내부 회의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 조치를 검토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광범위한 확전’을 우려해 말렸지만, 이란이 도발하면 트럼프가 추가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바이든의 이란 핵 합의 복원 구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다만 CNN은 “이란이 굴욕을 당했지만 전면전까지 치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경제 제재로 이란은 전쟁을 일으킬 만한 여력이 부족하다. 지난 1월 미군이 이란 군부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를 드론으로 사살했을 때도 보복을 다짐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만약 전면전을 일으키면 바이든이 이스라엘 편으로 돌아선다는 것을 이란도 알고 있다”며 “이스라엘 요인 암살이나 사이버 공격 정도로 이란인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수준의 보복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