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인과 미국의 번영을 위한 현대차그룹(HMG for American People & Prosperity)’. 지난 5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한 뒤 현대자동차가 미국의 정부 기관과 연방 상·하원 의원실, 주요 싱크탱크 등에 배포한 홍보용 책자(브로슈어)다. A4 용지 두 장짜리 단출한 분량이지만 현대차가 1986년 미국에 진출한 뒤 미국의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얼마나 기여했고, 첨단 기술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미국 회사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시각적 이미지를 앞세워서 보여준다.
세계 각국 정부와 주요 기업들이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와 원활한 관계를 맺기 위해 워싱턴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현대차가 선제적으로 뿌린 작은 책자가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다. 현직 싱크탱크의 중견급 연구원은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미국도 아닌 외국의 기업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웃 리치(대외 접촉)를 한 경우는 아직 없어 워싱턴 정가에서 빠르게 소문을 타고 있다”고 했다.
간결한 분량의 책자는 숫자를 큼지막하게 앞세우고 눈에 확 들어오는 이미지를 앞세워 현대차가 40년 가까이 미국 경제에 일조해왔다는 걸 보여준다. 가장 먼저 앞세운 숫자가 57만과 그 이상을 뜻하는 +(플러스) 기호다. 현대차는 미국 내에서 57만개가 넘는 일자리를 창출했는데 이는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 인구(2023년 기준 약 56만5000명)보다도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다음 숫자는 205억달러(약 28조8120억원)+. 현대차가 모빌리티·부품·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한 투자 금액이다. 그 아래로는 미국 지도와 함께 64+라고 돼있고, 현대차 및 계열사들의 로고가 두 줄로 배치돼 있다. 현대차가 미국 내에서 64곳이 넘는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어 현대·기아·제네시스를 합친 총 미국 내 딜러샵 숫자(1862)와 올해 미국에서 생산한 차량 대수(70만+), 올해 미국 내 사회공헌 기여 금액(6800 만달러+) 순으로 이어진다. 특히 사회공헌 기여 금액의 대표 사례로 1998년부터 2억5000만달러의 연구·치료 기금을 지원한 소아암 퇴치 캠페인 ‘호프 온 휠스’가 소개됐다.
숫자뿐 아니라 각 항목이 어떤 부분인지 쉽게 이해하도록 시각화한 것도 이 책자의 특징이다. 가령 현대차가 자율 주행·소형 모듈 원자로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협업하고 있는데, 올해에만 웨이모(구글의 자율 주행 분야 자회사)·제너럴 모터스(GM)·우버·아마존 등 미국 기업과 맺은 파트너십을 소개하며 각 분야를 간결한 시각적 이미지로 묘사했다. 또 파트너십을 맺은 기업은 로고와 함께 주력 사업 영역을 알 수 있는 사진도 곁들였다. 책자는 “현대차그룹(HMG)은 지난 40년 가까이 미국 공동체의 필수적인 일원으로 50주의 미국인들을 지지해왔다. 강력한 투자로 미국과 미국인들의 성장을 위한 우리의 오랜 헌신을 지속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책자는 단문(短文)의 시각화 자료를 선호하는 트럼프와 측근 인사들의 취향을 적극 반영했다는 점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는 우리 정부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외교부도 올해 서울·워싱턴에서 트럼프 측 인사들과 만날 때마다 통계와 시각화 자료 등을 동원해가며 “한국이 동맹의 일방적인 수혜자가 아니고, 군사·경제·통상·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핵심 파트너로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정부 고위 관계자)고 한다.
지난 11일 외교부의 영문 X 계정에 올라온 자료를 보면 각종 그래픽 요소를 동원해 한 페이지에 한국이 방위비 등을 공정하게 분담하고 있고, 우리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대미(對美) 투자를 하고 있는지를 상술했다. 주미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이 고용을 비롯한 미국 경제에 얼마나 잘 기여하고 있는지를 강조할 계획인데 (현대차 자료를) 적절히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기업들이 지난해 미국에서 약정한 투자 금액은 역대 최대 규모인 215억달러(약 30조2000억원)에 달하지만, 미국 고립주의를 추구하는 트럼프의 귀환으로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도 선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 2월 해외 대관 업무 조직인 ‘글로벌 폴리시 오피스(GPO)’를 사업부급으로 확대 개편했다. 윤석열 정부 초대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지낸 김일범 부사장,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을 지낸 우정엽 전무, 청와대 외신대변인 출신 김동조 상무 등이 포진했다. 최근에는 연원호 전 국립외교원 경제기술안보 연구센터장을 글로벌경제안보실장으로 영입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정의선 회장의 포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