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둔 19일 축하 행사가 열린 워싱턴 DC의 대형 경기장 ‘캐피털 원 아레나’엔 2만명이 넘는 지지자가 몰렸다. 이날 “USA(미국)”를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트럼프는 “내일 여러분을 매우 행복하게 만들 많은 행정명령을 보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추락(American decline)’은 이제 더 이상 없다”고 했다. 이날 행사명은 ‘MAGA 승리의 랠리’였다. 트럼프의 선거 구호이자 ‘미국 우선주의’로 상징되는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집권 1기(2017~2021년)보다 훨씬 강하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미 정치의 심장부에 귀환했다.
트럼프는 상징적 MAGA 모자를 쓰고 환호하는 지지자 앞에서 1시간 동안 연설했다. 그는 “취임 첫날인 20일부터 우리나라가 직면한 모든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적인 속도와 힘으로 행동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법 이민 차단을 위한 남부 국경 보안 강화, 화석 연료 등 에너지 산업 부흥,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폐기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첫날부터 이를 위한 행정명령에 대거 서명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트럼프 측은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행정명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연설은 그의 선거운동 곡이었던 ‘Y.M.C.A.’의 원작자인 미국 댄스 그룹 ‘빌리지 피플’이 등장해 이 노래를 열창하며 마무리됐다. 트럼프 대통령도 가운데 서서 박자에 맞춰 팔을 들며 몸을 흔들었다. 워싱턴 DC는 민주당의 아성이지만 이날은 시내 곳곳이 ‘MAGA’라고 쓰인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로 메워졌다. 8년 전 1기 취임식 때의 비교적 침착한 분위기와 대조되는 흥분된 분위기가 워싱턴 DC를 채웠다.
트럼프의 취임 전야 연설이 진행된 실내 경기장 주변은 새벽부터 수만 명이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눈과 비가 내렸지만 지지자들은 줄을 선 채 피자로 식사를 때우며 “트럼프”를 외쳤다. 약 2만명 수용이 가능한 경기장이 가득 차자 5~6시간씩 줄을 서고도 들어가지 못한 수천 명의 지지자는 휴대전화로 생중계를 보며 경기장 밖에서 “USA”를 외쳤다.
◇”어리석은 바이든 정책 폐기”… 트럼프, 첫날부터 행정명령 몰아쳐
19일 오후 5시가 되자 행사장의 트럼프는 가수 리 그린우드의 ‘갓 블레스 U.S.A’ 노래에 맞춰 객석에서 무대로 걸어 내려왔다. 가족과 측근들이 먼저 나와 트럼프의 역사적인 대선 승리를 한껏 추켜세운 뒤였다. 빨간 넥타이를 맨 트럼프는 “우리가 이겼다!(We won!)”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로 내일부터 우리나라를 되찾는 일을 시작하겠다. (민주당이 집권한) 지난 4년간의 내리막길이 마무리되고 미국의 자존심과 위엄, 힘을 되찾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취임 직후 남부 국경 보안 강화, 가스·석유 시추 재개, 틱톡 금지 유예 등을 예고했다.
그가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불법 이주자 문제였다. 그러면서 곧바로 국경 보안 조치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내일 저녁 해가 질 때쯤에는 우리 국경에 대한 침략이 끝날 예정”이라며 “내일 취임사에서 소개할 국경 보안 조치는 우리 국경을 복원하기 위한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광범위한 노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불법 이주자 추방도 즉시 시행하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급진적이고 어리석은 바이든 정권의 행정명령도 즉시 철회하겠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기후 대응을 위해 미국 연안에서 신규 가스 개발과 석유 시추를 금지한 바이든의 행정명령을 폐기하겠다고 했다. 또 바이든 행정부의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도 폐기 대상으로 지목하며 “남성 트랜스젠더(성전환자)의 여성 스포츠 참여도 즉시 금지시키겠다”고 했다. “미국 군대에서 좌파의 ‘워크(woke·‘깨어 있음’, 민주당의 정치적 올바름 강조를 비꼬는 용어) 이념을 제거해 군대를 예전처럼 강하고 존경받는 조직으로 복원할 것”이라고도 했다.
한국 등 주요 교역국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관세에 대해선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일각에선 트럼프가 취임 직후 전 세계 모든 국가에 15%의 보편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는 애초 이날 시행 예정이던 ‘틱톡 금지법’과 관련, “틱톡을 구해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을 보장하겠다”며 “틱톡의 운영을 승인하되, 미국이 50%의 소유권을 갖는 방식으로 협력하겠다”고 했다. 미 의회가 개인 정보 유출을 우려하며 틱톡 사용을 금지한 ‘틱톡 금지법’ 시행일인 19일을 앞두고 미국 내 서비스를 중단했던 틱톡은 이날 트럼프의 ‘구두 지원’을 받고 서비스를 전격 재개했다. 아직 앱 다운로드나 업데이트는 할 수 없지만, ‘배수진’처럼 단행했던 서비스 전면 중단 조치는 푼 것이다.
트럼프는 이어 “내일 이 큰 경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은 J6(1·6 의회 습격 사태) 인질에 대한 내 결정에 대해 매우 행복해할 것”이라 했다. 2021년 트럼프 대선 패배에 불복하며 의회를 점거한 1·6 사태로 처벌받은 이들에 대한 사면을 뜻한다. 또 미국 내에 인공지능(AI) 공장, 이스라엘 아이언돔과 같은 미국판 방공망 구축 등을 언급했다.
폭스뉴스는 이날 트럼프 측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가 취임 즉시 약 200개의 행정명령 서명에 나설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해상 풍력 계약 일시 중지, 전기차 의무화 종료, 공무원 재택근무 폐지 등과 관련된 행정명령이 시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다만, 트럼프가 지난 1기 집권 4년간 서명한 행정명령이 총 220개여서, 취임 초반에 200개를 서명할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는 당선의 ‘1등 공신’이자 정부효율부(DOGE) 수장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도 무대에 올려 발언하도록 했다. 머스크는 아들 손을 잡고 나와 “우리는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이 승리가 변화의 시작”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DNI) 국장,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 등 의회 인준 과정에서 논란에 휘말린 후보자들도 일일이 호명하며 힘을 실어줬다.
☞미국 대통령 행정명령
대통령이 정책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의회의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효력을 갖는다. 미국 헌법 제2조의 ‘행정권은 대통령에게 속한다’는 조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로 연방 정부기관의 운영을 지시하거나 기존 법률을 구체화하는 데 사용된다. 행정명령이 삼권분립의 원칙에 어긋나고 남용된다는 지적도 때때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