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 루비오 신임 미 국무장관이 21일 국무부 청사에서 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마코 루비오 신임 미 국무장관이 21일 국무부 청사에서 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과 함께 국무부에도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트럼프 취임을 전후해 고위급 정무직을 포함한 인사 30여명에 대한 퇴직 요구가 있었다고 미국 언론들이 21일 보도했다. 이는 정권 교체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볼 수 있지만, 트럼프 이너 서클은 1기 때 국무부의 ‘저항’으로 주요 의제가 좌초됐다는 생각이 강해 미국 우선주의 구현을 위한 개혁의 시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분위기 속 한미동맹과 북한 비핵화 등을 중시한 정통 지한파(知韓派)들도 퇴조하는 흐름인데, “김정은과 잘 지내겠다” “부자 나라를 보호하는 데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트럼프의 시각과 맞물려 한미동맹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대니얼 크리텐브링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달 중 퇴임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보수·진보 정부를 가리지 않고 쓰임을 받았던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트럼프 1기 때 베트남 대사를 지냈다. 바이든 정부에선 동아태차관보로 커트 캠벨 부장관과 보조를 맞춰 인도·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관여를 주도했다. 서울 근무 경험은 없지만 2023년 성 김 대북특별대표가 은퇴하고, 정 박 부대표도 퇴직한 뒤에는 사실상의 대북특별대표 노릇을 하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속 한미와 한·미·일의 대응을 조율했다. 외교 소식통은 “통상은 후임자가 의회 인준을 받고 부임할 때까지 전임자가 자리를 지키는 데 이번에는 교체 속도가 유난히 빠르다”며 “일부 고위 관리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오래 근무할 의향이 있다 말했지만 거절 당했다”고 했다.

대니얼 크리텐브링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국무부

크리텐브링크 같은 지한파 외교관의 조기 퇴장은 대북 문제나 한미 방위비 같은 현안에 있어서 매가의 입김이 더 강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걸 의미한다. 과거 미국 측 인사들이 북한 비핵화나 대북 제재 등과 관련해 최소한의 ‘입바른 소리’를 했던 것과 달리 트럼프 측 고위 관계자들은 “북한은 핵을 보유한 세력(nuclear power)”(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후보자) “어떤 제재도 북핵을 막지 못했다”(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는 말을 공개 석상에서 서슴없이 하고 있다. 트럼프 역시 20일 백악관 약식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에 대해 ‘뉴클리어 파워’란 표현을 반복했는데 만일 트럼프 정부가 북한의 비(非)공인 핵보유국 지위를 현실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김정은과 톱다운 방식의 협상이 이뤄질 경우 미국 입장에선 핵 군축 또는 핵 동결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면 한미가 지난 30년 동안 추구한 북한 비핵화 목표는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된다.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매가가 득세할 경우 방위비나 무역 불균형(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이 한미관계에 새로운 ‘폭탄’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현금 자동 지급기)’이라 칭하며 “내가 대통령이었으면 100억 달러(약 13조6500억원)를 내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 2만8500명 수준인 주한미군 규모도 약 4만명으로 과장하며 “매우 강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 때문에 매우 심각한 위험에 놓이게 하고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 입장에선 국무부 출신이 아닌 외부의 매가 인사를 주한 대사로 내리꽂는 방법도 있다. 현재 중국·일본과 달리 한국 대사 인선이 지연되고 있는 건 트럼프가 한국을 경시해서라기 보다는 이 자리가 경력 외교관이 가는 자리로 돼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1기 때 해리 해리스 태평양 사령관을 대사로 임명한 것과 같이 이른바 ‘낙하산’이라 불리는 외부 인사를 보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트럼프 1기 때 비(非)외교관 대사의 비율은 43.5%로 절반에 육박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일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일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인준이 통과된 루비오는 김정은과 북한의 핵 폭주를 비판해 온 대북 매파고,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인사다. 다만 미국의 정통 외교 노선을 추구해 온 그가 매가의 등쌀 속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지가 관건이다. CBS는 21일 국무부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루비오가) 외교 정책과 국가 안보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지만, 일부 직원들은 그가 얼마나 최고 직책에 머물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루비오는 이날 취임 일성으로 “분쟁 예방을 추구하겠지만 미국의 안보나 국익이 희생되는 건 안 된다”고 했다. 플로리다주(州)가 지역구로 이번 119대 의회에서 하원 외교위원장에 선임된 브라이언 마스트 의원도 최근 “해외에서 드래그 쇼(여장 남자쇼)를 하고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과 연결되지 않은 모호한 관계를 찾으려 노력하는 등 ‘워크(woke·깨어 있음)’ 프로그램을 지시한 사람들의 뿌리를 뽑을 것”이라고 했다. 마스트는 부친이 6·25전쟁 참전 용사지만 한국 방문 경험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