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에서 순서가 결코 모든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깥으로 보여지는 건 그것뿐이니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의미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2기 행정부의 외교 수장으로 21일 내각 주요 인사 중 가장 먼저 상원 인준을 받아 취임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21~23일 사흘 동안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취임 일성으로 “미국, 그리고 이 나라의 국가 이익 증진을 우선순위로 하겠다”고 했는데, 국무부에도 미국 우선주의와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루비오는 가장 먼저 미국의 다자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 외교장관들과 만났다. 한정(韩正) 중국 부주석이 시진핑(習近平) 특사로 워싱턴 DC를 찾은 가운데 대중국 견제가 지상 목표인 쿼드 회원국들을 불러 균형을 맞춘 것이다. 루비오는 쿼드 외교장관 회담 외에 ①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 인도 외교장관 ②페니 웡 호주 외교장관 ③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일본 외무상과 차례로 양자 회담을 가졌다. 루비오는 미일 동맹을 “지역 안보와 번영의 초석(cornerstone)”이라 표현했다. 일본은 이르면 2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와 트럼프 간 정상회담도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에 인도·태평양이란 개념을 제대로 입력시킨 사람이 트럼프가 ‘그리운 친구’라 부르는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다.
루비오는 이어 ④필리핀 ⑤이스라엘 ⑥캐나다 ⑦베네수엘라 ⑧인도네시아 ⑨아랍에미레이트(UAE) ⑩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 카운터파트와 연쇄 통화를 가졌다. 다만 베네수엘라의 경우 미국이 ‘정당한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는 에드먼도 곤잘레스 우루티아, 야당 지도자인 마리아 마차도와 각각 대화를 나눴다. 베네수엘라는 트럼프가 측근인 리처드 그리넬을 특사로 임명하며 가장 먼저 거론했을 정도로 2기 정부의 관심이 큰 영역이다. 전통의 우방인 캐나다 멜라니 졸리 외교장관과의 통화에서는 “주요 현안에 대한 트럼프의 새로운 접근 방식”을 논의했다고 했는데, 이는 트럼프가 취임 전부터 제기한 관세·불법 이민 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루비오는 취임 이틀 차인 22일 한국의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11번째로 통화를 가졌다. 루비오는 한미동맹이 “한반도 및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 안보, 번영을 위한 핵심축(linchpin)”이라고 했다. 린치핀은 마차나 수레, 자동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꽂는 핀을 뜻하는데 외교적으로는 ‘동반자’란 의미로 쓰인다. 우열 개념은 아니지만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정부 이후 2010년대 들어 한미동맹을 린치핀, 미일 동맹은 코너스톤으로 각각 규정해 왔다. 루비오와 조 장관의 통화에서는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도 강조됐는데, 한국의 비상 계엄·탄핵 정국 이후 미 조야(朝野)에서는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지속 가능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루비오가 첫 사흘 동안 접촉한 19국 중 8국이 인도·태평양에 있다. 이어 중동(5국), 미주(3국), 유럽(2국·튀르키예도 포함) 순이었다. 이는 트럼프 2기 역시 인·태 지역의 동맹·파트너 국가와의 연계를 통한 중국 견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비오는 상원의원 시절 의회에서도 손에 꼽히는 중국 매파였고, 청문회에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창설한 호주·영국과의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피력했다. 전임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아프간 미군 철수,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등으로 인·태 지역에 충분한 자원을 투사하지 못한 것을 임기 중 가장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가자 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마무리되는 수순이고 4년 차에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도 트럼프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출구를 찾게 되면 미국의 외교 자원은 인·태 지역에 집중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