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통화하고 “푸틴과 상호 방문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양측 협상팀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終戰)을 위한 협상을 바로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12일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도 이날 트럼프와 통화했다고 밝히며 “우크라이나는 누구보다 평화를 원한다. 이를 완수할 절차를 미국과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와 푸틴이 공식적·공개적으로 대화하기는 트럼프 ‘1기(2017~2021년)’ 때인 2020년 7월 이후 처음이다.

트럼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모두 통화하며 종전을 논의했다고 알려지면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끝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만 트럼프가 밝힌 종전 방식이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의 구상에 가까워, 우크라이나 및 그동안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온 유럽 등 다른 자유 진영이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는 이날 통화 후 기자들과 만나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했고 우크라이나의 영토 완전 수복에 대해선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그동안 양보할 수 없다고 밝혀온 나토 가입, 영토 수복 등 두 가지 목표에 선을 긋는 동시에, 러시아가 이미 점령한 영토 대부분을 현 상태로 두고 추가 침공을 멈추는 방식으로 종전을 추진하겠다고 암시한 것이다.

타스통신 등 러시아 매체들은 이날 두 정상이 약 1시간 30분 동안 통화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오늘 아침에 한 시간 이상 길게 훌륭한 통화를 했다”며 “나는 푸틴이 그것(전쟁)이 끝나길 원한다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휴전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고, 너무 머지않은 미래 어느 시점에 휴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구체적 시점 언급은 없이 “우리는 아마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선언은 협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푸틴에게 큰 양보를 제안한 셈”이라며 “트럼프는 러시아와 접촉할 경우 먼저 우크라이나와 긴밀히 협의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종전 원칙까지 뒤집었다”고 했다.

◇러시아에 유리한 종전 협상… 뒤에서 웃는 중국과 북한

약 3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발발한 전쟁은 미국·유럽 등 나토를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러시아·이란·북한 등 권위주의 진영의 전쟁으로 번져 왔다.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휴전이나 종전 조건으로 2014년 러시아가 무력으로 병합한 크림반도 및 2022년 침공 이후 러시아가 점령한 모든 영토 수복을 내걸었고, 미국 등 자유 진영도 이 원칙을 지지해 왔다. 트럼프의 이날 발언은 이런 오랜 구도에 균열을 일으키고 미국과 러시아가 밀착해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협상에서 소외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울 가능성이 크다.

그래픽=김현국

협상 개시 소식이 알려진 직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와 주요 7국이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모든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지만,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종전 회담에 참여할 유럽 국가가 있느냐는 질문에 “현재 말씀드릴 유럽 국가는 없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 당국자들을 인용해 “트럼프와 푸틴의 이날 통화는 미국이 러시아와 협상하려고 우크라이나나 유럽연합(EU)과 협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를 주었다”며 “미국은 또한 나토에 가입하고 국경을 2014년 이전으로 복원하려는 우크라이나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대선 유세 때부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24시간 안에 끝내겠다”고 하면서 종전 협상에 속도를 내겠다고 암시해 왔다. 트럼프는 이날 푸틴과 통화 후 “우리는 양국(미·러)의 위대한 역사 및 2차 대전에서 성공적으로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돌이켜봤다. 양국의 강력함에 대해 논의했고 우리가 협력함으로써 얻게 될 위대한 이익에 대해 논의했다”고 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도 “푸틴은 양국이 함께 일할 때가 됐다는 트럼프의 주요 발언을 지지했다. 또 트럼프가 적대 행위를 조속히 중단하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찬성했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트럼프는 우크라이나가 안전보장의 핵심으로 여기는 나토 가입 문제에 대해 “나는 그것이 실용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서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해 “전쟁을 연장하고 더 많은 고통을 일으키는 허황된 목표”라고 밝혀 논란이 일었는데, 자기도 동의한다는 맥락이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전 수준으로 영토를 수복하는 것에 대해 “일부는 되돌아올 것”이라면서도 “그럴(완전 수복)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0%를 점령한 러시아는 현재 점령 영토를 러시아 땅으로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헤그세스는 종전 후 우크라이나 안전보장을 위한 다국적군 주둔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미군이 파병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난해 12월 트럼프와 회담한 젤렌스키는 일단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날 푸틴과 한 통화에 대해 트럼프와 대화했다는 사실을 소셜미디어에 밝히고 “미국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의 침공을 멈추고 평화를 달성할 기회에 대해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그는 앞서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러시아·미국의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가 제공하는 선별적 정보에 미국 측이 놀아나선 안 된다”고 우려한 바 있다. 젤렌스키는 14~16일 독일에서 열리는 뮌헨안보회의에서 J D 밴스 미 부통령과 만나 종전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20일엔 트럼프의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인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찾을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가 이날 암시한 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멈출 경우 2차 대전 이후 자유 진영이 지켜온 ‘무력으로 다른 국가의 영토를 빼앗지 않는다’는 국제 질서가 무너지는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빼앗은 상태로 전쟁이 끝나고 나토가 대표하는 자유주의 진영이 이를 묵인할 경우 중국의 대만 침공 등 강대국의 무력 공격에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그린란드를 매입하겠다고 압박하며 오랫동안 금기시된 ‘제국주의적 기조’의 조짐을 보이는 것도 국제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변수다. 나토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로 내정된 알로냐 헤트만추크는 최근 본지에 “이 전쟁은 이미 단순히 러시아 대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북한·이란·중국 등 권위주의 4국이 연대를 이루는 구도가 되었다.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종전이 이뤄진다면) 중국·북한·이란이 얻을 이익이 적지 않을 전망이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한반도와 대만 해협, 중동 등에도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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