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벌이는 일부 법조계와의 전쟁에 다국적 로펌이 밀집한 워싱턴 DC의 K스트리트에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후 2개의 로펌을 콕 집어 기밀 정보, 연방 정부 접근에 제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는데 이런 식의 보복이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CNN은 11일 법조계 인사들을 인용해 “로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트럼프가 지난달 25일 “사법 절차의 무기화에 관여했다”며 직원들의 보안 등급을 정지시킨 ‘커빙턴 앤 벌링(Covington & Burling LLP)’은 삼성전자가 주요 고객으로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른 보조금 신청 과정을 대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1919년 설립된 커빙턴 앤 벌링은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하는 다국적 로펌이다. 전형적인 ‘화이트 슈 로펌(white shoe law firm·흰색 더비 구두를 즐겨 신는 백인 남성들이 주로 일한다는 이미지가 강해 이런 이름이 붙음)’ 중 하나로 서울 강남에도 사무실이 있다. 이 회사는 2023년 10월 삼성에 고용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보조금 390억 달러(약 56조원)를 투입한 반도체법의 ‘상업용 제조 시설에 대한 자금 지원 기회’ 인센티브를 지원받는 데 관여했다. 텍사스주(州) 테일러시 등에 첨단 반도체 시설을 짓고 있는 삼성은 47억5000만 달러의 보조금을 받기로 돼 있는데, 올해 2월 이를 홍보하며 “미국은 이제 세계 5대 반도체 기업의 제조 시설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가 됐다”고 했다. 트럼프는 취임 후 여러 차례 반도체법을 폐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가 특정 로펌을 겨냥하게 된 건 커빙턴 앤 벌링이 바이든 정부 때 자신의 대선 결과 뒤집기, 기밀문서 유출 의혹 등을 파헤친 잭 스미스 특검에 14만 달러 상당의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 보안 허가를 받은 커빙턴 앤 벌링 소속 변호사와 직원들이 유탄을 맞았다. 백악관은 “잭 스미스와 그의 직원들은 트럼프를 표적으로 삼기 위해 5000만 달러 이상의 세금을 지출했다”며 “이런 특권은 선거에서 개입하거나 당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 “정부 무기화와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법 집행 남용을 영원히 종식시키겠다”고 했었다.
1912년 설립돼 워싱턴주 시애틀에 본사를 두고 있는 ‘퍼킨스 코이(Perkins Coie)’ 역시 최근 행정명령을 통해 직원들의 기밀 정보, 연방 정부 건물 접근 제한이 이뤄졌다. 연방 정부가 퍼킨스 코이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도 담겨있다. 12일 법원이 여기에 일시 제동을 걸었지만 특정 로펌을 겨냥한 행정명령에 법조계가 뒤숭숭한 분위기다. 이 회사가 트럼프의 미움을 사게 된 건 2016년 대선에서의 악연(惡緣) 때문이다. 퍼킨스 코이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 캠프에 자문 역할을 했는데 트럼프는 자신의 러시아 내통 의혹이 제기되는 데 일부 역할을 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2022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정 비율을 인종에 따라 배분하는 채용 관행이 있는 것도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폐기를 공언한 트럼프의 심기를 거스르는 부분이다.
트럼프가 “너무 부정직하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할 로펌이 많다”고 밝혀 냉랭한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단순히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여론 조성 작업, 로비 활동 등에 관여했던 K스트리트의 로펌들이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있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트럼프 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 수임을 피하거나 수임했더라도 공개적인 의견 표명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CNN은 “변호사 집단을 상대로 한 백악관의 보복이 대담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이번 조치는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변해 줄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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