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서비스가 중단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워싱턴 DC 사무실 입구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15일 서비스가 중단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워싱턴 DC 사무실 입구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부효율부(DOGE) 수장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주도하는 연방 정부 구조조정 여파 속 1942년과 1996년 각각 시작된 미국의 소리(VOA)·자유아시아방송(RFA) 서비스가 15일부터 전면 중단됐다. 미국의 주요 기관 중에선 보기 드물게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한반도, 특히 북한 인권 및 대북 정보 유입 등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들이라 이번 조치가 갖는 의미가 한국에도 결코 작지 않다. 문제는 트럼프가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다른 기관도 축소 또는 폐지를 벼르고 있어 이번 일이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14일 VOA·RFA를 관할하는 글로벌미디어방송국(USAGM) 기능·인력 최소화를 지시하며 서명한 행정명령에는 1968년 미 의회가 설립한 싱크탱크인 ‘우드로 윌슨 센터’도 구조조정 대상으로 지목됐다. 유엔 창설에 산파 역할을 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기관은 수만 건의 역사적 문서를 직접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를 활용해 외교·안보, 냉전사 문제 등을 연구하는데 워싱턴 DC의 몇 안 되는 ‘한국통’ 싱크탱크이기도 하다. 대미 공공외교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주도해 한반도 전문가와 지한파(知韓派)를 육성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지난 2015년 6월 워싱턴 DC의 우드로 윌슨센터 '현대차-KF 한국역사 및 공공정책 연구센터' 발족식 모습. (왼쪽부터 당시 직함 기준으로) 제임스 퍼슨 우드로 윌슨 센터 한국연구센터 담당 연구원, 선준영 전 유엔대표부 대사, KF 유현석 이사장, 제인 하먼 우드로 윌슨 센터 소장, 에드 로이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 안호영 주미 한국대사, 이광국 현대차 워싱턴사무소장. /조선일보DB

특히 지난 2015년 6월에는 KF와 현대차 후원으로 300만 달러(약 45억원)를 투입해 ‘현대차-KF 한국역사 및 공공정책 연구센터’를 발족했다. 한미경제연구소(KEI) 출신인 트로이 스탠거론이 현재 국장으로 있다. 한때 워싱턴 DC를 대표했던 한반도 전문가인 수미 테리 외교협회 연구원도 거쳐 간 자리다. 북한 김여정에 관한 책 ‘더 시스터(The Sister)’를 펴낸 이성윤 터츠프대 교수도 여기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한 싱크탱크 연구원은 “한국 정부·기업 돈으로 만든 자리라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수 있지만, 구조조정 대상으로 찍힌 기관의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심리적 위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도 윤석열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 발표 2주년을 맞아 윌슨센터에서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비상계엄 여파로 직전에 취소됐다.

1983년 의회가 ‘전 세계 민주주의 확산’을 명분으로 만든 민주주의진흥재단(NED)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지한파 정치인이자 하원 ‘코리아 코커스’ 의장을 지낸 피터 로스캄 전 의원이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트럼프 1기 때 미·북 대화에 관여한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대북특별대표(현 보잉컴퍼니 부사장)도 이사진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트럼프 측 상당수 인사가 NED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예산을 둘러싼 크고 작은 송사(訟事)가 이어지면서 보조금 집행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NED는 한때 100국 이상 2000개가 넘는 비영리 단체(NGO)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 통일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 대북 인권 단체를 ‘사무 감사’ 등으로 압박할 땐 일종의 동아줄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탈북민 출신인 지성호 전 국민의힘 의원이 트럼프 정부 1기 때인 2018년 의회 연두교서(SOTU)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호명에 목발을 올려 호응하고 있다. /조선일보DB

NED가 북한 인권 문제의 국제 사회 공론화, 대북 정보 유입 등에 있어서 한 역할은 우리 정부 못지않은 것이었다. 2014년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그해 9월 설립된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이 대표적이다. 이 단체는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에 대비해 북한 인권 범죄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 과학적 증거를 확보·활용하고, 탈북민 면담을 통한 피해자 중심 접근에 적지 않은 공을 들이는데 여기에는 NED의 지원이 든든한 뒷배가 됐다. 또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고, 다음 세대의 탈북민 리더십을 양성하는 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21대 국회에서 탈북민 출신 비례대표를 지낸 지성호씨는 과거 대북 인권 단체 ‘나우(NAUH)’ 대표로 있으면서 NED 지원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이야기가 워싱턴 DC에 알려져 트럼프 1기 때인 2018년 의회 연두교서(SOTU) 연설에도 초청됐다. 트럼프의 호명에 목발을 흔든 그의 모습이 지금도 워싱턴 조야(朝野)의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VOA·RFA의 폐쇄도 가볍지 않은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RFA는 북한 내부 사정이나 북·중 접경 지대에서의 인권 유린 등에 대한 특종·탐사 보도를 통해 국제 사회에 그 실상을 알리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는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였는데 RFA는 적지 않은 북한 주민들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였다. 이 때문에 북한은 2020년 RFA를 청취한 혐의로 자국 주민을 처형시키고, 이를 단체 참관하게 하는 등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탈북민 출신인 이현승 글로벌평화재단 연구원은 “VOA·RFA의 역사와 공적, 수많은 기자의 노력이 폄하돼서는 안 된다”며 “북한 문제에 있어서 두 언론의 한국어 서비스는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해왔다. 이들이 생산하는 무형의 가치인 진실과 자유민주주의는 독재·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다”고 했다.

16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 한국어 서비스가 중단된 모습. /VOA 홈페이지

-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39

🌎국제퀴즈 풀고 선물도 받으세요!https://www.chosun.com/members-event/?mec=n_qu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