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화성 연쇄살인사건’ 10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미제 살인사건을 저지른 이춘재(57)가 2일 마침내 법정에 서서 얼굴을 드러냈다. 그가 화성 사건 첫 범행을 저지른 1986년 이후 무려 34년만이다. 이춘재는 살인 범행 14건에 대해 “모두 내가 진범이 맞다”고 증언했다.
이춘재는 이날 오후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에 출석했다. 이 날재판은 8차 사건의 진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했으나, 지난해 이춘재의 자백을 계기로 재심을 청구한 윤성여(54)씨의 재판으로 이춘재에 대한 증인심문이 진행됐다.
이춘재는 이날 윤씨의 대리인인 박준영 변호사가 “작년 9월 재수사에 나선 경찰이 부산교도소에서 접견을 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는 질문에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가족에 대한 생각 등 모든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고 했다. 또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이춘재는 또 “처음에는 경찰의 조사를 거부하려 했으나 프로파일러와의 면담 과정에서 어린시절부터 살아온 얘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열려 자백을 결심하게 됐다”며 “경찰이 따로 사건 관련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기억을 되살려 범행에 대해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가 제시한 경찰의 수사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춘재는 자필로 ‘살인 12+2, 강간 19, 미수 15’ 등 자신의 범행 목록을 담아 제시했다. 이춘재는 이에 대해 “살인은 화성 근처가 12건, 청주가 2건이라는 의미”리고 차차근차근 설명했다. 또 “내가 적어주자 경찰이 많이 놀라더라”는 말도 했다.
이날 청록색 수의를 입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채 마스크를 쓰고 법정에 들어온 이춘재는 짧은 스포츠 머리에 반백이었다. 이마에는 주름이 있고 몸매는 홀쭉했다. 다만 마스크를 바꿔쓰는 과정에서 노출된 얼굴은 공개된 젊은 시절의 사진처럼 코가 큰 모습이었다. 그는 이날 부산교도소에서 수원지법으로 호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춘재가 자백한 살인 범행에는 화성 사건 10건을 포함해 1987년 12월 수원 화서동 여고생 피살사건, 1989년 7월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에 그가 결혼해 청주로 이주한 이후에 저지른 1991년 1월과 3월 여고생·부녀자 피살사건이 포함돼 있다.
그는 경찰의 재수사 과정에서 성폭행도 34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수사를 거쳐 이 가운데 9건을 이춘재의 범행으로 특정해 입건했다. 그러나 이들 사건 모두 2006년을 마지막으로 공소시효가 끝났다. 이 때문에 이춘재는 이번 8차 사건 재심에 피고인이 아닌 증인 자격으로 출석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모(당시 13·중학생) 양이 성폭행 피해를 본 뒤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듬해 범인으로 검거된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이날 이춘재가 증인의 지위에 불과하다며 촬영을 불허해 언론의 사진·영상 촬영은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이춘재의 증언에 국민의 관심이 높은 점을 고려해 본 법정 뿐만 아니라 별도의 중계법정 1곳을 마련해 최대한 많은 방청객이 재판을 방청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