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국방부 요직(공무원 2급)을 거친 예비역 준장 A씨는 2017년 전역 후 대기업 취업을 위해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심사를 요청했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4급 이상 공무원은 퇴직일로부터 3년간 공무원 시절 마지막 5년 동안 업무와 관련성이 있는 곳에는 취업할 수 없다. A씨가 가려는 곳은 국내 굴지 방위산업체. 그럼에도 취업 심사를 통과해 방산업체 전무로 옮길 수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예외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재취업하려는 곳과 업무 연관성은 있지만 예외적으로 퇴직 공무원 취업을 허용하는 제도다. 정부는 ‘공공의 이익’ ‘산업 발전 및 과학 기술 진흥’ ‘국가 안보와 대외 경쟁력 강화’ ‘전문성이 증명되고 취업 후 영향력 행사 가능성이 적은 경우’ 등 9가지 사유에 대해서는 퇴직 공무원에 대해 취업 제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예외 규정을 통해 관련 분야 취업에 성공한 퇴직 공무원이 현 정부 들어 크게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17일 국민의힘 박대수 의원실이 공직자윤리위에서 받은 취업 심사 자료에 따르면, 현 정부 출범 직전인 2016년 73%였던 예외 규정 심사 통과율은 2020년 90%로 올랐다.
2018년 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취업 심사를 요청한 공무원 2893명 중 2410명이 심사를 통과했다. 업무 연관성이 있으면 탈락 대상이다. 그런데 ‘업무 연관성은 있지만 예외 인정을 해 달라’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예외 인정을 받아 심사 허들을 넘은 인원이 이 기간 343명으로 전체 취업 인원의 14.2%에 달한다.
이렇게 예외 규정을 이용해 심사를 통과하는 비율은 매년 늘고 있다. 전체 통과자 중 예외 규정 적용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6년 8.2%였지만 지난해 13.9%, 올해 1~3월엔 23%를 기록했다. 특히 이 예외 규정은 장·차관급에 해당하는 정무직 공무원에게 특히 관대했다. 2018년부터 올 3월까지 장·차관급 35명이 예외 규정을 이용해 취업 심사를 통과했는데 예외 규정 적용자 비율은 41%에 달했다. A12면에 계속
정부는 지난 2015년 1월 2급 이상 고위 공무원, 장·차관 등에 대해 업무 연관성 판단 기준을 기존 ‘부서’에서 ‘기관’으로 확대했다. 퇴직 공무원과 민간 유착을 더 강하게 줄이겠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실제로는 업무 연관성이 있어도 예외 규정을 이용해 손쉽게 취업 심사를 통과하고 있었다.
정부가 규정한 예외 인정 사유 대부분이 기준이 모호해 재취업 근거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심사 회의록은 물론이고, 어떤 이유로 예외를 인정해줬는지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퇴직 공무원에 대해 재취업 심사를 하는 것은 전관예우 등을 막는다는 취지인데,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 기업·협회 등 가리지 않아
2018년 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취업 심사를 신청한 공무원은 2893명. 이 중 1087명은 주차관리원, 단순 건물 관리 등 저임금 생계형 일자리를 위해 심사를 신청한 인원이다. 나머지 1806명 중에선 1551명이 취업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취업 심사를 통과한 1551명은 민간 기업과 각종 협회 등에 전방위로 진출했다. 48.8%인 746명은 민간 기업으로 재취업에 성공했다. 20대 그룹별로 보면 한화가 36명으로 가장 많았고, 삼성과 SK가 각각 26명으로 뒤를 이었다. 이어 부영(13명), LG(10명), KT(10명), 현대차(9명), 롯데(8명), CJ(7명), GS·농협(각각 5명) 등의 순서였다. 취업 심사 통과자의 10.7%에 해당하는 166명이 20대 기업에 자리를 잡았다.
민간 기업에 이어 퇴직 공무원이 가장 많이 찾은 분야는 공공기관(228명·14.7%), 협회(224명·14.4%) 등이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는 고위 공무원부터 4급 직원까지 업계와 관련된 각종 협회의 상근 부회장, 사무국장 등으로 진출했다. 2018년 이후 취업 심사를 요청한 협회와 연합회 등은 확인된 곳만 226곳이고 이 중 190곳에 대해 공무원들이 취업 심사를 통과했다. 정부 관계자는 “부처에서 업계와 의견 교환이 필요할 때 퇴직 공무원들이 사실상 중간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한국면세점협회는 주로 관세청(38명) 출신들이었고, 도로교통공단은 경찰(33명)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퇴직 공무원의 5.5%(84명)는 금융 기업행, 5.1%(81명)는 로펌행 취업 심사가 통과됐다. 로펌은 검찰과 경찰 외에도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금융위원회, 산업부, 환경부 등 다양한 부처에서 고문, 전문위원 등으로 퇴직 공무원을 영입했다. 장·차관이나 1·2급 등 고위 공무원이 아닌 3·4급 직원도 많았다. 로펌은 변호사 영입(20명)보다 각종 위원(27명), 고문(23명) 영입이 더 많았다.
일부에선 업체와 해당 부처 간 유착이 의심되는 경우도 눈에 띄었다. 국방부로부터 군 시설 사업을 따낸 적이 있는 B건축사사무소의 경우, 2018년 이후 최근까지 무려 7명의 국방부 퇴직 관료가 취업 심사를 신청하고 통과했다. 국방부 출신들은 총기, 방탄복, 함정·잠수함 장비 업체 등 방산 업체에도 대거 진출했다.
◇심사 과정 자체 불투명
정부 안팎에선 퇴직 공무원들이 재취업을 승인받는 과정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슷한 사례에 해당하는데도 누구는 취업 승인을 받고 누구는 통과 안 되는 사례도 많다. 재작년 관세청 고위직에서 퇴직한 C씨는 모 IT 기업에 취업하려 심사를 받았으나 ‘업무 관련성이 있다’는 이유로 불허 결정을 받았다. 그런데 몇 개월 뒤 관세청 고위 공무원 D씨는 같은 기업에 대해 ‘예외에 해당한다’며 심사를 통과했다. 두 사람 모두 고위 공무원 출신이어서 근무했던 부서와 관계없이 포괄적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는데도 한 사람만 허가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