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작한 글로벌 ‘관세 전쟁’의 불똥이 테크 업계로까지 번지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세계 주요국이 미국 빅테크 제재 카드를 꺼내 들고 있다. 유럽연합(EU)·중국 등에서 서비스 제한과 반독점 조사 등 유탄을 맞게 된 빅테크들은 단기적으로 매출 감소 등 경영적 타격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실리콘밸리 테크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정작 중국·EU 등 핵심 시장에서 미 빅테크는 고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이 같은 악재로 애플 등은 주가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EU 빅테크 겨냥 ‘바주카포’ 장전
5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은 미국이 유럽에 관세를 부과할 경우 실리콘밸리 빅테크에 직접적인 보복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유럽을 주요 시장으로 두고 있는 미국 빅테크들의 IT 서비스 및 상업적 활동을 금지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 캐나다·멕시코에 25%, 중국에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표적으로 유럽을 지목하고, “조만간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은 “우리는 필요한 곳에서 거친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떤 방식으로건 우리 자신의 이익을 수호할 것”이라고 했다. FT는 “미국이 관세 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경우를 대비해 EU는 빅테크를 겨냥한 ‘보복의 바주카포’를 장전했다”고 보도했다.
유럽 당국은 미국의 관세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통상 위협 대응 조치(Anti-Coercion Instrument·ACI)’ 카드를 검토 중이다. ACI는 외국이 EU의 특정 회원국에 강압적인 무역 조치를 취했을 때, 유럽연합 전체가 해외 기업의 서비스 중단, 외국 자본의 투자 금지 등 다양한 맞대응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럽이 ACI를 사용할 경우, 2023년 제정 이후 처음으로 활용되는 사례로 기록된다.
유럽은 ACI를 근거로 아마존·페이스북·인스타그램·유튜브 등 인기 모바일 앱을 유럽에서 다운받지 못하도록 조치할 수 있다. 애플의 아이폰 기기 판매에 제한을 줄 수 있고, 영국 팹리스(설계) 반도체 기업 ARM의 지식재산권(IP) 대미 수출을 제한하는 것도 거론되고 있다. 프랑스 인공지능(AI) 기업인 미스트랄 등 유망 스타트업에 대한 미국 빅테크의 투자를 제한할 수도 있다. 모두 주요 빅테크의 사업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조치다.
◇중국, 애플·구글·인텔 제재
이미 중국에선 미 빅테크가 관세 전쟁의 유탄을 맞고 있다. 10% 추가 관세가 부과된 중국이 대대적인 보복 조치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은 애플이 앱스토어에서 앱 개발자들에게 최대 30%의 수수료를 떼고, 외부 결제를 가로막는 정책을 문제 삼으며 반독점 조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애플이 10여 년간 유지해온 앱스토어 정책을 변경하지 않을 경우, 공식적인 조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악재가 쌓이면서 애플 주가는 올해 들어 8%가량 하락했다. 애플 전문가로 유명한 댄 아이브스 웨드부시증권 분석가는 “이는 모두 트럼프와 중국 간의 포커 게임이며, 애플은 테이블 위의 칩(판돈)이다”라고 했다.
중국 당국은 구글에 대해서도 반독점법 조사를 시작했다. 스마트폰 운영체제(OS) 시장을 애플의 iOS와 양분하고 있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OS 지배력을 살피고, 오포·샤오미 등 중국 휴대폰 제조업체에 미치는 피해를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엔비디아에 대한 반독점 조사를 시작했고,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인 인텔에 대한 조사도 현재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반독점 조사는 결과에 따라 거액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중국에서의 사업 변경을 요구할 수도 있다. 중국은 미국과 협상이 어려워질수록 빅테크에 불리한 조사 결과를 내놓고 협상의 우위를 점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실적 타격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빅테크 기업들이 미국 경제의 중심축인 데다, 주요 빅테크 수장들은 트럼프 대통령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미국의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해선 빅테크를 겨냥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본 것”이라고 했다.
☞통상 위협 대응 조치(ACI)
2023년 발효된 유럽연합(EU)의 무역 규칙. 타국이 EU 회원국을 무역 제재나 관세로 압박할 경우, EU 차원에서 보복관세와 수입제한 등으로 공동 대응할 수 있다. 2021년 리투아니아가 대만과 가까운 외교 관계를 구축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경제적 보복 조치를 받은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