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세계 최고 세율의 상속세 현실화 논의에 착수한 가운데, 상속세 개편의 핵심인 최고세율(50%) 인하가 빠져 알맹이 빠진 개편이란 지적이 나온다. 상속세 현실화 논의는 그간 줄곧 상속세 개편에 부정적이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상속세 일괄 공제액을 현행 5억원에서 8억원으로 올리고, 배우자 공제액을 현행 5억원에서 10억원을 올리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급진전됐다. 여기에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배우자 상속세 전면 폐지’라는 역(逆)제안을 하고 나서자, 상속세 개편에 키를 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배우자 상속세 면제는 이혼 등 재산분할까지 고려하면 나름 타당성이 있다”고 동의하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가 안정적 기업운영 및 가업(家業) 승계를 통한 고용유지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에 부정적 입장을 밝히면서 ‘앙꼬 빠진 찐빵’이란 비판도 나온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일본(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여기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반영한 할증과세(20%)까지 감안하면 실제 세율은 60%가량으로 일본보다 높다.
반면 OECD 38개 회원국 중에는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상속세가 아예 없는 나라가 14개국이나 되고, 이들 국가를 포함한 상속세 최고세율 평균은 15% 수준에 그친다. OECD 회원국 중 상속세가 있는 나머지 24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 평균도 26%로 한국(50%)의 절반가량에 불과하다.
이 와중에 한샘(가구인테리어)·락앤락(주방용기)·쓰리세븐(손톱깎이) 등 국내 대표 중견·중소기업들이 가혹한 상속세 부담을 견디다 못해 지분을 사모펀드 등에 매각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상속세 납부하다 국영기업화
국내 대표 게임사 넥슨은 지난 2022년 창업주인 고(故) 김정주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직후 유족들이 무려 5조3000억원의 상속세 고지서를 받아들었는데 이 중 4조7000억원을 회사 지분으로 물납하면서 정부가 2대 주주가 됐다. 사실상 국영기업화된 셈이다.
이 밖에 국내 대표 제약기업인 한미약품은 창업주 고 임성기 회장 사후 상속세 부담으로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고, 국내 최대 기업 삼성도 지난 2020년 고 이건희 회장 사후 11조4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 부담에 시달리면서 회사가 지금처럼 휘청이게 됐다는 지적이 많다.
이재명 대표는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에 ‘초(超)부자 감세’라는 딱지를 붙이고 “여기다 또 이상한 초부자 상속세 감세 같은 조건을 붙이지 말고 처리하자”고 선을 긋고 나선 상태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여부에 따라 혹시 치러질 수 있는 조기대선을 염두에 두고 머릿수가 많은 1주택 중산층 표심을 겨냥해 일단 최고세율 인하는 제외하고 상속세를 개편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국민의힘의 이 같은 조바심에는 한때 ‘기본사회’ ‘대동세상’ ‘억강부약’을 외치다 최근 ‘중도보수’를 표방하며 돌변한 이재명 대표의 마음이 또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4선)은 주간조선에 “국민의힘은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와 관련한 법안을 이미 여러 건 내놨지만 민주당의 반대로 현실적으로 처리가 어렵다”며 “이번에는 민주당과 합의 가능한 부분만 먼저 처리하고 추후 최고세율 인하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빙산이론’ 적용하면 1304조원 추정
여야의 상속세 개편논의 와중에 비현실적 상속세 등을 피해 해외로 빠져나간 돈만 무려 1000조원이 넘을 것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국세청은 2011년부터 해외금융계좌를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2023년부터는 해외 가상자산도 신고대상에 첫 포함했는데 2023년 신고된 해외금융계좌(5억원 초과)의 신고금액만 무려 186조4000억원에 달했다. 다만 신고대상이 ‘잔고 5억원 초과’라서 5억원 이하면 국세청에 별도 신고의무도 없고, 전체 산정에서도 제외된다. 예컨대 10억원의 돈을 각 3억3300만원씩 제3자 명의로 3개의 해외금융계좌에 분산예치하고 있으면 이에 따른 신고 의무는 없다.
국세청 역시 5억원 이하까지 포함한 전체 해외금융계좌는 ‘추정불가’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국세청 국제세원담당관실의 한 관계자는 “그나마 2019년부터는 신고대상이 기존 10억원에서 5억원으로 강화된 것”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세청에 신고된 해외금융계좌 잔액을 기초로 ‘빙산이론(Iceberg Theory)’ ‘마약범죄 암수율’(28.57배, 박성수 세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분석) 등을 적용할 경우 전체 해외 금융계좌에 담긴 돈만 보수적으로 집계해도 1000조원이 넘을 것이란 추정이 제기되고 있다.
‘빙산이론’은 빙산은 수면 위로 8분의1만 나와 있고, 8분의7은 수면 아래에 잠겨 있다는 이론이다. 이에 기초해 2023년 신고된 해외금융계좌(186조4000억원)를 기준으로 이 금액의 7배가 미신고 해외금융계좌 잔액(1304조8000억원)에 달할 것이란 추산이 나온다. 만약 ‘빙산이론(7배)’ 대신 ‘마약범죄 암수율(28.57배)’을 적용하면 전체 해외금융계좌는 천문학적 수준으로 급증한다.
1304조8000억원이란 추정치는 단순한 추정치에 그치지 않는다. 이 수치는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조세정의네트워크(TJN·Tax Justice Network)’의 2012년 분석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2012년 TJN은 전 세계 139개국 가운데 상위 20개국의 재산해외도피 금액을 추정 분석한 결과 한국의 재산해외도피 금액이 7790억달러 상당으로 중국(1조1890억달러), 러시아(7980억달러)에 이어 세계 3위라고 발표해 충격을 준 바 있다. 브라질(5200억달러), 쿠웨이트(4960억달러), 멕시코(4170억달러)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달러당 1450원 내외를 오르내리는 환율을 고려하면 무려 1130조원 가까운 금액인데, ‘빙산이론’을 적용한 미신고 해외금융계좌 추정치(1304조8000억원)에 가까운 셈이다.
TJN의 분석은 당시 전 세계 과세당국에 메가톤급 충격파를 불러온 까닭에 그 뒤로 업데이트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추정치(1130조원)와 그간의 물가상승 등을 고려하면 ‘빙산이론’을 적용해 미신고 해외금융계좌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1304조8000억원’이란 금액이 결코 비현실적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관세청 서울본부세관 특수조사팀장을 지내고 현재 관세법인 ‘대륙아주’ 본부장으로 있는 이호능 관세사는 “혹자는 국내 재산도피액 7790억달러(약 1130조원)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판단하는데, 그간의 재산 해외도피 수사경험을 토대로 판단하면 이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 조사관 출신으로 서울본부세관 특수조사팀장,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 수사관,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 수사관 등으로 일한 이 관세사는 수출입 외국환 거래와 관련해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 전문가다. 김수남·채동욱·윤석열(현 대통령) 등 역대 검찰총장 3명과 직접 손발을 맞췄고, 지금은 관세법인 대륙아주의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 같은 경력을 바탕으로 천홍욱 전 관세청장(관세법인 대륙아주 회장) 등과 함께 ‘무역금융범죄의 싸이클’(한국관세무역개발원)이란 무려 600쪽에 달하는 사례 해설서를 펴내기도 했다.
이 관세사의 지적처럼 해외여행 보편화와 함께 해외 금융계좌 신고인원과 금액은 나날이 느는 추세다. 국세청에 따르면 10억원 초과 해외 금융계좌 신고 제도를 처음 실시한 2011년에 525명이 11조5000억원의 해외 금융계좌를 갖고 있다고 신고한 이래 신고인원은 지난해 한 해를 빼고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늘고 있다.
해외 가상자산이 첫 포함된 2023년에는 무려 5419명이 5억원 초과 해외 금융계좌를 갖고 있다고 신고했다. 자연히 해외 금융계좌에 담긴 금액도 2016년 50조원 벽을 첫 돌파한 이래, 최근에는 매년 60조원 내외를 기록 중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2024년도의 해외 금융계좌 신고액도 64조9000억원에 달했다.
가상자산과 쪼개기 밀반출 병용
막대한 국부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신고 해외 금융계좌 파악은 시급해 보인다. 하지만 수출입 가격 부풀리기 등 가격조작과 특허사용료, 임가공비 등 용역거래를 위장한 재산 해외도피는 물론, 재산 해외도피와 관련한 각종 수법이 나날이 고도화·지능화되고 있어 사실상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이름이 거론된 쌍방울그룹 대북송금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7월 1심에서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의 유죄를 선고받은 조직폭력배(전주 나이트파) 출신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은 임직원 수십 명을 동원해 이른바 ‘쪼개기 배달’과 환치기 수법을 병행해 무려 800만달러(약 116억원)를 중국으로 밀반출한 뒤 북한에 전달했다.
내국인이 해외여행을 갈 때는 미화 1만달러(약 1500만원)까지는 별도 신고 없이 휴대하고 출국할 수 있다. 이 같은 규정을 악용해 가족 및 친인척, 임직원을 총동원해 외화를 밀반출하는 식이다. 종교단체의 해외선교 헌금으로 위장해 외화를 밀반출한 경우도 있었다.
홍콩이나 중국 등지는 비행기표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양국을 오가는 정기 카페리선까지 있어 외화운반에 따른 제반비용도 크게 들지 않는다. 중국의 일부 항만은 통관도 비교적 허술하고, 조선족 동포나 화교(華僑) 네트워크를 이용해 환치기 수법으로 국내에 있는 돈을 내보내는 것도 상대적으로 쉽다는 평가다. 실제 국세청에 따르면 홍콩과 중국은 개인 신고자산 보유국 중 각각 3위와 5위에 올라 있다.
최근에는 비트코인·스테이블코인 등 가상자산을 이용한 재산 해외도피도 과세당국의 골칫거리다. 가상자산은 아직 정식 지급수단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USB의 일종인 ‘콜드월렛(온라인과 연결되지 않은 전자지갑)’ 등에 담아서 해외로 가져간 뒤 처분해 합법적인 무역거래 대금으로 위장해 이를 현금화하면 과세당국으로서는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형해화된 재산국외도피죄 처벌
역으로 2018년에는 가상자산과 환치기를 병용해 시가 11억원 상당의 서울 시내 아파트를 매입한 중국인이 관세청 등 당국에 적발된 적도 있다. 이 같은 어려움으로 국세청 역시 “전 세계 과세당국이 도입을 추진 중인 가상자산 거래내역 등의 정보교환 보고 규정에 따라 정보교환을 준비 중”이라며 “신고대상자는 해외 가상자산 계좌도 조속히 수정신고와 기한 후 신고를 해주길 당부드린다”고 읍소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하지만 2017년 외국환거래법 ‘제7조’마저 삭제되면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상 재산국외도피죄 역시 사실상 형해화된 상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조항은 ‘채권의 회수명령’과 관련된 조항으로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환시장의 안정과 외국환거래의 건전화를 위하여 비거주자에 대한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거주자로 하여금 그 채권을 추심하여 국내로 회수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바 있다.
한데 해당 조항이 삭제되면서 역외탈세로 국세청에 적발 시 재산환수 없이 과태료만 물고 끝나는 식이 됐다. 역외탈세는 사실상 재산 해외도피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로, 대개 분식회계·자금세탁·역외탈세 과정이 줄줄이 뒤따르는데 처벌이 가벼워진 것이다.
기재부 외환제도과의 한 관계자는 “기존에는 50만달러(약 7억3000만원)가 넘어가는 대외채권은 무조건 3년 이내에 회수하도록 했는데 기업 입장에서는 해외자산운용을 제한하는 등 너무 과도하다는 불만이 제기됐다”며 “외국환거래법의 취지는 국경 간의 거래와 관련한 법으로 불법자금과 관련해서는 특경법 등 다른 법에도 관련 처벌 조항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해외로 빠져나간 돈이 합법적인 자금으로 탈바꿈한 뒤 ‘검은 머리 외국인’이 국내에 투자하는 형태로 다시 들어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투자촉진법상 외투기업에 제공되는 본사 및 공장용 토지취득이나 임대료 감면, 조례특례제한법상 법인세 및 소득세, 재산세 감면과 관세, 부가가치세 면제 등 부당한 세제혜택을 누린다. 여기서 벌어들인 수입은 합법적 배당금의 형태로 재차 해외로 빠져나가는 일종의 ‘파이프라인’으로 활용되는 형국이다. 심지어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해외 행동주의펀드 뒤에 숨어서 과도한 배당확대를 요구하거나, 경영권을 방어하는 든든한 ‘우군(友軍)’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과적으로 국내에 머물러 있으며 내국인 고용창출 등에 쓰여야 할 막대한 재산을 국외로 유출시키는 재산 해외도피는 당근과 채찍을 병행해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다. 해외 과세당국과 유기적인 협조·공조체제를 구축해 재산 해외도피와 자금세탁 등을 거쳐 형성되는 미신고 해외 금융계좌에 대한 발굴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국내 기업에 대한 법인세는 물론 가업승계 및 고용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상속세와 증여세율을 획기적으로 낮춰서 기업경영주들이 법적 리스크를 무릅쓰고 해외로 부를 빼돌리고자 하는 유인 자체를 차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호능 관세사는 “각국 과세당국 간 정보가 완벽히 공유되더라도 제3자 개인 또는 법인 명의로 은닉했을 때 국세청이나 관세당국에서 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며 “재산 해외도피는 뿌리 깊은 역사로 세금 많이 내는 사람이 존경받는 국가적 문화가 조성되지 않는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국내 기업이 외국 기업과 51 대 49의 합작법인을 운영할 경우 국내 기업은 과도한 상속세 부담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외국 기업에 경영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다”며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 문제는 단순히 초부자 감세라는 프레임으로 다룰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