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벌어진 제1연평해전 참전 장병 8명이 국가보훈부로부터 국가유공자 ‘비해당’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8명은 당시 승전을 일군 주역이라 평가되는 참수리 325호정의 승조원으로, 신체 부상자 3명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지난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해 심사 과정을 거쳤으나, 지난 2월 보훈부는 이들이 △교전 직후의 진단서가 존재하지 않고 △만기 전역을 했으며 △전역 후 사회 및 경제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제1연평해전은 우리 측 사망자가 없는 등 대승을 거둔 전투였지만 △10m 이내까지 근접했던 전투라는 점 △‘선제 사격금지’ 교전수칙이 적용되던 때 일어났다는 점에서 참전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더욱 생생했다고 할 수 있다. 비해당 판정을 받은 참전자들은 “같은 서해를 지킨 전투고, 심지어 승리했지만, 제2연평해전이나 천안함 생존 장병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서해수호의날 행사에도 공식 초청대상이 아니다. 눈으로 보이는 희생이 크지 않았다는 이유다”라고 강조했다.
북한 함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벌어진 제1연평해전은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규군이 정면으로 충돌한 첫 번째 해전이었다. 당시 우리 해군은 NLL을 사수하기 위해 14분 만에 북한 어뢰정 1척을 격침하고, 경비정 5척을 대파시켰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 30여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교전 과정에서 우리 해군은 고속정·초계함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장병 9명이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
이렇듯 대승전을 거둔 제1연평해전이지만, 이후에 발생했던 제2연평해전(2002년), 천안함 피격 사건(2010년), 연평도 포격전(2010년) 등에 비해 올바른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1연평해전은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 기조가 활발하던 때인 1999년 6월 15일 발발했다. 제1연평해전 발발 7개월 전인 1998년 11월부터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며 남북 간 교류가 본격화됐었다. 제1연평해전 발발로부터 딱 1년이 지난 2000년 ‘6월 15일’에는 남북 정상회담과 ‘6·15 남북 공동선언’이 체결되면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았었다.
“우리는 승리했지만, 25년째 잊혔다”
서해 수호를 성공적으로 해낸 승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남북 간 대화를 강조하며 교전의 의미를 축소하기에 급급했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금까지 이어져 국민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제1연평해전에 참전했던 선정오 당시 병기병(47세, 당시 21세)은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의 교전 상황을 들어준 것은 기자님이 처음이다. 참전 사실을 말하면 군대 무용담을 과장해 이야기하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제2연평해전만 안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전투를 자랑스러워하지도, 겪는 고통을 당당하게 말할 수도 없게 됐다.”
제1연평해전의 교전 시간은 ‘15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선제 타격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촉즉발의 전운을 견뎌야 했던 시간은 10일이다. 1999년 6월 6일 처음으로 북한 경비정과 어선 약 20~30척이 NLL 남쪽으로 침범했고, 이튿날인 7일부터 교전이 발생한 15일까지 우리 해군은 북한 경비정, 함정 등과 근접 대치하며 ‘배로 밀어내기 시도’ 등 북한군의 위협 기동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주간조선과 인터뷰한 8명의 참전자들은 당시 북한군과의 거리는 ‘10m 남짓’이었다고 말했다.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 경비정과 우리군 사이 거리가 1500~2000m였고, 천안함 피격 사건은 3㎞ 거리의 북한 잠수정 공격으로 발생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해상전이 아닌 ‘육탄전’을 대비하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20살이 갓 넘은 의무병 신분이었던 참전자들은 교전 전 10일 동안 겪은 대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 기자님과 나 사이 앉아있는 거리 정도에서 북한군들 얼굴을 봤다. 까까머리에 너무 말랐고, 어려 보이고, 겁에 질려 보였다. 그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북한 어선에서 풍기던 생선 냄새도 기억한다. 평소에는 생선을 잡다가 온 학생들 같았다.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1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북한포가 옆으로 우리 배를 겨누고 있었다. 함교 위에 서있던 북한 정장의 모습이 생생하다. 무표정으로 우리 쪽 기관병에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무서웠다.”
“(북한군이) 권총을 든 채로 우리 배로 넘어올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럼 나는 바로 죽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먼저 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일주일 넘게 잠을 못 자고 대치 상황을 겪다 보니 나중에는 ‘쏠 거면 빨리 쏴줬으면 좋겠다’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유언장을 쓰라’며 연필 한 자루랑 종이 한 장씩을 받았었다. 뭘 써야 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초코파이와 콜라를 배급받으며 ‘이게 마지막 만찬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정신적 피해 인정할 수 없다”는 보훈부
보훈부는 이들에게 국가유공자 ‘비해당’ 판정을 내리며 주요 이유에 대해 ‘교전 직후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PTSD) 진단서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공식적인 진단서가 없기 때문에 PTSD와 전투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8명의 참전자들 중에는 파편상, 골절 등의 부상을 신체 곳곳에 입은 부상자도 포함되어 있을뿐더러,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PTSD를 겪고 있다. 당시 외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별도의 정신적인 치료도 전혀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 교전 후 살아서 돌아온 이들이 자대에서 며칠 쉰 후에 또다시 같은 서해 바다로 나가게 되기도 했다. 교전 후 타 부대로 발령되는 것 또한 부사관 등 윗선에 비해 늦었다. 교전 이후 6개월 이상 같은 배를 탄 참전자도 있었다. 또한 주간조선과 인터뷰한 8명의 참전자들은 당시 PTSD라는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았고, 사회적 분위기상 정신과 치료를 받기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천안함 피격 사건 생존 장병들이 PTSD로 인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2021년부터이다. 당시 천안함 생존 장병들을 위해 관련 업무를 진행했던 안종민 행정사는 “실제로 이전까지 PTSD로 인한 국가유공자 인정 사례가 드물었던 점을 고려할 때, 2021년이 처음으로 PTSD를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해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1999년 당시에는 PTSD 피해자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절차조차 없었기에, 애초에 신청이 불가능했다는 것이 참전자들의 주장이다. 참전자들은 교전 직후 정신 증상과 관련한 설문지를 작성한 상황에 대해 공통적으로 이같이 설명했다. “신체 정신 상태를 체크하라고 설문지를 나눠줬는데, 이때 서로 얘기를 나눴던 것이 ‘정신병원에 끌려가면 맞는다’ 같은 말들이었다.” “그전에 실제로 의무실에 갔다가 맞은 적이 있었다. (이런 기억이 있는 상태에서) 내 상태를 살필 수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공로가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신적 증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문제가 될까 봐 숨기고 있었다.
서해수호의 날에도 초대받지 못해
제1연평해전이 승전이며 우리 군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점 또한 오히려 이들을 잊히게 했다. 교전 과정에서 우리 해군은 고속정·초계함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장병 9명이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 제2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이 6명 전사, 부상 18명, 함정 격침이라는 피해를 입었고,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는 46명 전사, 58명 부상, 천안함 침몰이라는 큰 피해를 입은 것에 비하면 압도적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연평해전 참전자들은 ‘서해수호의 날’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지금껏 행사에 단 한 차례도 초청받지 못했다. 서해수호의 날은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전 등 ‘북한의 3대 서해 도발’ 희생자와 생존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국가 안보의식을 높이기 위한 법정 기념일인데, 이 3대 서해 도발에 제1연평해전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한 보훈부 관계자는 “부상자, 사망자 말고 참전자까지 100% 참전명예수당을 받는 분들은 아직까지 6·25전쟁과 베트남전쟁만 해당한다.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포격전 모두 각각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사망자나 부상자뿐만 아니라 생존자까지도 관련된 분들은 최대한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 초청드리려고 하고, 국가유공자 같은 경우도 가장 낮은 등급인 7등급에 포함된 ptsd도 점점 많이 해드리려는 추세다. 그러나 기존의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보훈부에서 재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입법 등 제도상으로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보훈부에서 (제1연평해전 참전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