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진, 김무상, 김준연, 김준희, 선정오, 안태성, 엄정호, 이명근(가나다순). 이들은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25호정의 승조원 신분으로 최전방에서 북한 측 함정과 싸웠다. 북한 어뢰정 1척을 격침하고, 경비정 5척을 격침하며 승전보를 알렸지만, 25년 후 그들에게는 ‘국가유공자 요건 비해당’ 통지서가 돌아왔다.
엄정호 당시 의무병(48세, 당시 23세)은 인터뷰 도중 수차례 심호흡을 했다.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머리가 삐쭉삐쭉해지고 몸이 떨리기 때문에, 최대한 꺼내지 않아왔던 기억’이라고 했다. 그가 사전에 전달해준 메모를 참고해 최소한의 질문만 던지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25년간 꺼내지 않았던 기억이라기에는 그가 전하는 교전의 상황과 냄새, 소리는 어제 일을 톺는 듯 생생했다. 총소리가 들리고, 함교의 창문이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한 장 한 장 깨졌다. 이를 피해 몸을 엎드린 것이 그가 기억하는 교전의 시작이었다. 창문이 터지는 것이 멈췄음에도 엄씨의 몸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많은 곳에서 동시에 ‘의무병’을 부르는 소리도 났다. 엄씨는 다리에 총알을 맞은 상사 A씨를 발견하고 그를 통신실로 옮겼다. 통신실은 그때부터 임시 의무실이 됐다. 군복 바지를 가위로 자르니 허벅지 일부가 날아가 있었다. 살이 사라진 자리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살점이 찢긴 틈새로 하얀 뼈가 보였다. 엄씨는 자신의 손에 과산화수소를 부어 직접 부상 부위의 파편 이물질을 긁어냈다. 통증에 괴로워하는 상사를 보는 엄씨의 눈가도 떨렸다.
허벅지를 출혈 압박 붕대로 지혈하고 드레싱하는 와중에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엄씨의 귀를 때렸다. 함교에서 총알을 맞은 상사 B씨가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엄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통신실로 기어내려오면서 남긴 흔적이 흥건한 피로 남아 있었다. 군복 바지를 가위로 잘랐다. 의무병의 손 위로 뜨거운 피가 흐르고 고기 냄새가 퍼졌다. 파편이 사타구니 쪽을 찢으며 지나간 자리에 살점이 터져 있었다.
엄씨처럼 당시 참수리 325호정에 올랐던 참전자들은 공통적으로 당시 10일간 이어졌던 대치, 교전 상황을 기억해내는 것을 힘겨워했다. 또한 기억을 하는 방식은 화질이 또렷한 고화질이거나, 아예 공백인 식이 많았다. 감당할 수 없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에 압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억이 상실되는 현상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서 흔히 나타난다.
김준희(47세, 당시 23세) 당시 통신병은 교전 당시의 기억이 드문드문하다고 고백했다. 의무병 엄씨의 동기였던 김씨는 의무실로 변해버린 통신실에서 자신도 모르게 부상병의 피가 흐르는 곳을 찾아 지혈을 했다. 응급처치를 하는 엄씨를 도와 소독약과 붕대를 날랐다. 그는 교전 때 처음 울려퍼진 ‘팝콘 터지는 소리’와 교전 직후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는 “죽기 싫으면 양현 뒤로 빼”라는 음성을 선명히 기억한다. 북한군의 총탄이 선박을 때리자 ‘따닥따닥’ 팝콘 튀기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양현을 뒤로 빼라”는 음성은 교전이 끝나고 물에 잠기는 배를 이끌고 돌아갈 때, 조타를 하는 상황에서 수십번 들리던 소리였다.
그러나 교전 직후에 자신이 부상자 헬기이송을 도운 장면은 동료들에게 전해 들었을 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후 김준희씨는 부상자가 아닌 인원끼리 침수되어가는 배를 타고 물을 퍼내면서 인천까지 향했다고 한다. 선정오씨는 “처음 총탄 소리가 울려퍼진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면서 주마등처럼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음을 쭉 놓아버리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났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 같은 기억은 지금까지도 이들을 괴롭히고 있다. “교전 직후 사람 피가 여기저기 고여 있는 함교의 모습은 절대로 잊지 못한다. 정말 너무 역겨웠다”고 회상한 선정오씨는 교전 이후로 시각과 후각이 특히 민감해졌다. 그는 “조금만 (피와) 비슷한 냄새가 나도 힘들다. 가끔은 밥 먹으러 식당 갔다 온 내 몸에서 나는 음식 냄새도 견디기가 힘들고 예민해진다”고 말했다. 선씨를 포함한 참전자 다수는 물이 고여 있거나 기름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보면 ‘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피가 한꺼번에 많이 고여서 굳으면 끈적끈적하고 시커멓다. 멀리서 물이나 기름 웅덩이를 보면 생각이 무조건 그쪽으로 간다.” 평소 가위에 자주 눌리고 혼자서는 잠을 청하기가 힘들다는 선씨는 “교전 이후에는 바다 한가운데에 블랙홀 같은 게 있고, 그쪽으로 쫙 빨려들어가는 꿈을 많이 꾼다. 빈 공간에 혼자 불을 끄고 누워 있으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든다”며 “잠을 자기 위해 술을 한 병 정도는 꼭 마셔왔다. 지금도 매일 밤 한두 차례씩은 깬다”고 전했다.
지난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한 참전자 8명 중 3명은 신체적 부상도 당했었다. 엔진실에서 어깨와 목 뒤, 종아리에 부상을 당했던 안태성 당시 기관병(47세, 당시 23세)은 헬기로 후송돼 수술을 급히 받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수술 부위 외에 전체적인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기억한다.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때는 국소마취 상태였다. 의사가 수술 당시 “잘못 했다”라는 말을 하는 걸 들었고 그의 상처는 일자가 아닌 ‘ㄱ’자가 됐다. 15일 만에 쫓겨나듯 퇴원해 부대에 복귀했지만, 이후 샤워 등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종아리 등에 박힌 파편을 7~8개나 더 발견했다. 수술을 받은 상처에서는 고름이 나고 덧나기도 했다. 다른 참전자들과는 달리 정신 상태와 관련한 의료적 체크는 일절 이뤄지지 않았다. 교전 당시 새끼발가락이 부러졌던 것도 추후에 알게 되어 의무실에 갔었다. 그러나 최근 기록을 확인해보니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졌다는 소견서가 써져 있었다. 안태성씨는 지금도 노래방, 클럽 등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는 좁은 공간에 가지 못한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상처 부위가 바늘로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들면서 자주 저린다.
교전 직후의 상황도 이들에게 상처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준희씨는 교전 직후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내무반에 들어오니 소주를 줬던 기억이 있다. 그걸 먹고 자는데 다들 잠꼬대로 헛소리를 하더라.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소리가 제일 많았다. 교전 직후 설문지를 쓰는데 ‘우리가 여기 미쳤다고 잘못 쓰면 정신병원 끌려가서 워커로 맞는다’ ‘걸을 수 있으면 부상이 아닌 거다’ 같은 얘기를 나눴었다.” 김준연씨(49세, 당시 23세)는 당시 “당시 배가 심각하게 훼손돼서 대통령 방문 때문에 급하게 배를 수리하느라 며칠 밤낮을 새웠다”고 설명했다. 오른쪽 팔에 파편상을 당해 김무상씨(47세, 당시 21세)는 당시 전투 후에도 추가 근무로 다시 현장에 보내졌던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다시 그곳에 가는 게 전투보다 더 무서웠다”며 “트라우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김무상씨는 “당시 유서를 쓸 때 내가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고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용기내 신청한 국가유공자 심사 결과가 비해당 판정으로 나온 이후 스스로도 그 상처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 8명은 현재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판정을 받고 사비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이같은 내용이 담긴 개인 진단서를 보훈부에 제출했음에도 ‘비해당’ 판정을 내린 것이다. 오른팔에 총탄을 맞았던 이명근 당시 갑판병(47세, 당시 21세)은 보훈부 판정 이후 심정을 묻는 질문에 대해 “잘 모르겠다. 나는 원래 풀리는 일이 잘 없다.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도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라는 절망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곽영진씨(48세, 당시 22세)는 병원에서 심리상담사에게 “당시 서해 바다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라는 얘기를 처음 들으며 충격을 받았지만, 보훈부는 “만기 전역했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미해당 결정을 통보받았다. “심사과정에서 군무원에게 전화가 왔었는데, ‘제1연평해전’이 어떤 해전인지 전혀 모르더라. 그런데 어떻게 심사를 한 건지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김준연씨는 PTSD 진단과 관련해 보훈부로부터 “일상생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상처받았다고 했다. 그는 “전쟁의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국가가 인정해주기를 바랐을 뿐”이라며 “보훈부가 우리를 돈이나 노리는 사람들처럼 취급하는 게 더 괴롭다”고 말했다.
엄정호씨는 인터뷰 끝에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이런 얘기를 들어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나는 그걸 직접 겪었다 보니, 이게 그 순간이 끝이 아닌 걸 안다. 갑자기 그런 것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너무 참혹하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고, 앞으로 그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