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습격 사건’의 북한 무장 공비 출신 고(故) 김신조 목사의 빈소가 차려진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장례식장에 70대 백발 노인이 나타났다. 이 노신사는 1968년 1월 19일 대통령 암살조 김신조 일당의 침투 사실을 경찰에 처음으로 신고한 ‘나무꾼 4형제’ 중 막내 우성제(77)씨다. 첫 만남에선 ‘적’이었지만 나중엔 둘도 없는 형·동생 사이가 됐다. 우씨는 이날 조문 뒤 김 목사 아내의 손을 맞잡고 한동안 고개를 떨궜다.
우씨와 김 목사 인연은 5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1일 본지 통화에서 당시 상황이 어제처럼 기억나느냐는 질문에 우씨는 큰 한숨을 쉬었다. 1968년 1월 19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향해 얼어붙은 경기 연천 고랑포 여울목을 건넜다. 김신조 부대였다. 이들은 기관단총 31정, 실탄 9300발, 권총 31정, 대전차 수류탄 252발과 방어용 수류탄 252발, 단검 31정으로 중무장한 특수부대였다.
눈으로 덮인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 삼봉산 기슭에서 우씨 4형제가 이들과 마주쳤다. “군인 너덧이 서 있는데 딱 봐도 국군이 아니더라니까요. AK소총에 권총에 수류탄까지....” 소위 계급을 붙인 병사가 성제·철제 형제에게 “아까 네 명이던데 나머지 둘은 어디 있느냐”고 했다.
우씨가 “26사단에서 훈련 나온 거 아니냐. 우리 집에 가서 따뜻한 국이라도 먹자”고 하니, “우리는 지하혁명당 소속”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군인들은 “6개월 뒤 남조선이 해방된다”며 “지상낙원이 온다”고도 했다. 공비들 사이에서 투표가 벌어졌다. 이 형제들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청와대로 가는 길에 만나는 누구든 무조건 죽이고 땅에 파묻어서 흔적을 없애라는 임무를 받았기 때문이다. 투표 결과 살리고 죽이자는 의견이 반으로 갈렸다. 결국 “땅이 얼어 결국 묻지도 못하는 데 살려두자”는 결론이 났다. 오징어·엿도 주면서 신고하지 말라고 했다.
우씨는 “우리를 회유한답시고 선물이라면서 조잡한 일제 시계를 줬다”며 “나중에 보니 돈도 얼마 안 되는 거더라”라고 했다. 그는 “우리는 날짜·요일 다 나오는 일제 세이코 시계도 있었는데...”라고 했다. 이들은 신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 우씨가 내려와서 파출소로 곧바로 신고하니 밤 9시였다. “신고하면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에도 자신들이 본 광경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경찰은 한동안 믿지 못했다.
우씨 형제들은 이후에도 사건이 벌어진 이곳 초리골에 남았다. 목사가 된 김 목사는 이후로 몇 년마다 초리골에 찾아와 우씨 형제들과 만났다. 막내 나무꾼 우씨는 무장 공비를 신고한 공로로 경찰관이 돼 2005년 퇴직했다. 32년간 근무하면서 절반 넘게 대공 업무를 했다.
우씨는 김 목사가 이후 안보 강연 등에 나서면서 “제대로 전향했구나”라며 “그때부터 형님에 대한 마음이 열렸다”고 했다. 이후 이들은 1년에 두세 번 만나 점심, 저녁을 했다. 우씨는 이날 “목숨을 걸고 (김 목사를) 신고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며 “좋아하는 분이지만, (북한 간첩은) 다시 신고할 수 있으면 또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평안한 곳에 갔을 거다. 편히 쉬시길 바란다”고 했다. 김 목사 아내 최정화(80)씨는 “(우씨가) 빈소에서 글썽이는 눈으로 손을 꼭 잡아줬다”며 “외로운 남편의 인생에 친구이자 동생이 되어줘서 감사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