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본지 보도로 알려진 ‘글짓기 명문’ 합천여중 학생들을 위해 70대 할머니가 사비 500만원을 쾌척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만 졸업했다는 이 할머니는 “짧은 학창 시절이지만, 수업시간 선생님이 시(詩)를 읽어줄 때 정말 행복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며 “합천여중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가 떠올랐다”고 했다.

경남 합천여중 독서문예동아리 '무궁무진' 부원과 국어교사 김수선(사진 가운데)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합천여중은 지난해 전교생 158명 중 125명이 전국 문예 대회에서 수상하면서 '글짓기 명문'으로 불린다. /합천=김동환 기자

18일 합천여중에 따르면 지난 15일 오전 10시 30분쯤 학교 교무실에 한 할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대구에서 왔다는 구말연(77)씨였다. 합천이 고향인 구 할머니는 “조선일보를 통해 고향 소식을 접해 반가웠다”며 “김수선 선생님을 만나 학생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학교가 좋은 쪽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했다. 구 할머니는 직접 쓴 손편지와 함께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며 학교에 총 500만원을 건넸다.

경남 합천여중을 찾은 구말연(77) 할머니(사진 가운데)와 문성국 교장(왼쪽) 김수선 교사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구 할머니는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며 500만원을 학교에 전달했다. /합천여중

합천여중은 요즘 경남에서 새로운 ‘글짓기 명문’으로 통한다. 지난해 전교생 158명 중 125명(중복 포함)이 전국의 크고 작은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타면서다. 전교생 10명 중 8명이 수상한 셈이다. 조용하던 시골 학교의 변신은 지난 2023년 국어 교사 김수선(33)씨가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학생들의 난독(難讀) 문제를 해결해보자며 독서 동아리를 만들었고, 글쓰기를 권장했다. 학생들과 학교 도서관에서 동고동락하며 글짓기 대회를 준비했다. 수상으로 이어지자 학교 안에 글쓰기 바람이 불었다. ‘근화수기’라는 졸업 기념 문집도 김씨가 오면서 시작했다. 졸업생들이 쓴 글귀를 모은 것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졸업 앨범과 함께 자기 글이 담긴 문집도 받게 됐다. 지역에선 “해마다 인구가 줄어 ‘지역 소멸’ 위기에 빠진 합천에서 새 희망을 찾았다”는 말이 나왔다.

구 할머니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요즘은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삭막한 사회지 않느냐”며 “그런데 선생님 한 분을 통해 학생도, 학교도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경남 합천여중을 찾은 구말연(77) 할머니가 쓴 손 편지. 당초 현금 100만원을 가져온 구 할머니는 400만원을 더해 총 500만원을 학교에 전달했다. /합천여중

구 할머니에게 학창 시절은 한(恨)처럼 남아있다. 그는 “8남매 중 막내로 자랐고, 여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까지만 보내줬다”며 “공부도 잘했는데, 중학교도 못 가니 얼마나 억울했는지 1년 내내 울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학교를 갈 때 구 할머니는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고 한다. 직장을 찾아 고향을 떠날 때가 고작 19세였다.

그래서 “합천여중 이야기에 더욱 눈길이 갔다”고 했다. 짧은 학창 시절이었지만, 구 할머니는 “수업 시간 국어 선생님이 시를 읽어주던 행복한 순간을 잊질 못한다”고 했다. 그 기억 때문에 구 할머니는 60여 년째 문학 소녀로 살고 있다. 대구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는 구 할머니는 매일 1시간씩 글을 쓰고 있다. 2019년에는 ‘추억’이란 이름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는 “등단한 것은 아니고 누구에게 시 쓰는 법을 배운 적도 없다”면서 “그저 살면서 느낀 감정을 일기처럼, 기행문처럼 썼다”고 했다.

지난 10일 자 조선일보 A10면에 보도된 합천여중 기사. 이 학교 독서 동아리 '무궁무진' 학생들이 학교 도서관에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습.

그러면서 “김수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꿈꿀 수 있게 해주신 것 같아 감사하다. 저처럼 지금의 시절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친구가 있을 것이다”라며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선생님과 학생들의 꿈을 위해 잘 써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김씨는 “제가 한 것에 비해 너무 큰 응원을 받아 마음이 울컥했다”며 “아이들 모두 많은 응원과 격려를 받아 사기가 진작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했다.

문성국 합천여중 교장은 “할머니의 뜻에 따라 기부금은 학생 책 구입과 장학금, 독서·문예 관련 사업 등에 잘 쓰겠다”며 “학교 축제 때 구 할머니를 초대해 학생들 글과 함께 구 할머니의 시도 전시하려고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