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가 6·25 전후(戰後) ‘폐허 부산 재건의 아버지’라 불렸던 고(故) 리처드 위트컴 미군 준장 및 참전 동문들을 기리는 ‘6·25 전쟁 충혼비’를 건립하려다 학내 반대로 무산 위기에 놓였다. 당초 국가보훈부와 부산대는 작년 9월 학교 내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달 들어 민주화 운동 동문회와 학내 노조, 일부 교수가 “이념 갈등을 유발한다” “일방적 영웅화를 반대한다”며 잇달아 반대하고 나서면서 건립이 불투명해졌다.
부산은 6·25 전쟁 발발 후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1023일(2년 9개월)간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였다. 국토 90%를 북한군에 빼앗긴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8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결전을 벌인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이었다. 부산대는 피란민에게 학교 건물을 제공했고, 부산대 동문 255명이 참전해 피 흘려 가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위트컴(1894~1982) 장군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에 미군 군수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53년 겨울 부산역 인근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하자 부대 창고를 열어 구호와 지원에 나섰다. 그는 군사 물자를 무단 전용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당하게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했다. 그는 AFAK(미군대한원조) 기금을 지원받도록 하고, 부대원 월급 1% 기부 운동을 벌여 메리놀병원·성분도병원·복음병원 등의 건립을 도왔다. 예하 88개 부대와 지역 보육 시설을 연결해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봐 ‘전쟁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으로 불렸다. 퇴임 후 한국에 정착해 1982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혀 있다.
부산대와 보훈부는 “일상에서도 위트컴 장군과 동문 참전 용사들을 기릴 수 있도록 하자”며 작년 9월 11일 충혼비 건립 업무 협약을 맺었다. 작년엔 연세대와도 6·25 참전 추모비를 세우기로 합의했지만, 국립대에선 부산대가 처음이었다. 6월 캠퍼스 중심부인 부산대 박물관·물리관 사이 ‘새벽뜰’에 충혼비를 세우기로 하고 디자인 선정도 마쳤다. 제작 비용 1억원은 보훈부가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7개월이 지난 이달 중순 충혼비 추진을 뒤늦게 알게 된 일부 노조·교수 단체가 반대하고 나섰다. 부산대 교수회는 지난 14일 이사회를 연 뒤 학교 본부에 보낸 공문에서 “공론화 없이 추진되는 충혼비가 구성원 사이에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명백하다”며 추모비 건립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학내 비정규교수노조와 민주동문회 등도 학내에 현수막을 내걸고 “학내 이념 갈등 유발하는 계획 철회하라” “위압적인 비석 건립을 반대한다”고 했다.
본지는 지난 24일 부산대를 찾아 충혼비 건립을 반대하는 단체·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일방적 영웅화’는 안 된다”며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일부는 “(6·25 전쟁에서) 피해자·가해자의 경계가 모호하다”고도 했다. 비정규교수노조 부산대분회 한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선배들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수백 명을 죽이지도 못한 것으로 안다. 영웅도 아닌데 무슨 비를 세운다는 것이냐”고 했다. 이들은 ‘공론화 과정 부족’ 등을 반대 이유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론 “보수 정부가 추진하는 기념비가 ‘부마 민주 항쟁’의 성지인 부산대에 들어올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본지가 직접 만난 부산대 학생들 의견은 달랐다. 학생들 상당수는 “북한군에 맞선 동문들을 기리는 비를 어떻게 정치적인 문제로 볼 수 있느냐”고 했다. 국어국문학과 1학년 이지연(19)씨는 “동문들이 자랑스럽다. 충혼비를 본 학생들이 이들을 떠올리고 기릴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부산대 한의대 1학년 홍정민(21)씨는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추모비를 왜 반대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던 부산대 상대 출신 정병섭(92)씨는 본지 통화에서 “부산대 참전 동문들에게 ‘통일의 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들었다”며 “그러나 우리가 부산을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보훈부와 부산대는 추모비 건립을 계속해서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부산대 관계자는 “학내 구성원들을 상대로 설득 작업에 나서고, 추모비 설치 부지 변경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리처드 위트컴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에 미군 군수사령관(준장)으로 부임해 재건 활동에 헌신했다. 1953년 부산역 인근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군법까지 어기면서 부대 창고를 열어 이재민 구호에 나섰다. 메리놀병원·성분도병원·복음병원 등의 건립을 도왔고,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 부산대가 장전캠퍼스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받도록 했다. 퇴임 후 한국에 정착했고, 그의 유해도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