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급 법원에서 선발된 대표 판사들이 사법부 현안을 논의하는 법관대표회의가 7일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법관대표회의 제공

전국법관대표회의는 7일 열린 2020년도 정례회의에서 대검찰청이 만든 ‘판사 문건’에 대해 ‘법관의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을 침해한다는 입장 표명을 해야 한다’는 안건을 부결시켰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전국 각급 법원의 대표 법관들의 모임이다.

‘판사 문건’은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핵심 사안이다. 그러나 문건의 당사자 격인 법관들의 대표자들이 문건에 비판적인 입장 표명을 하지 않기로 하면서 추 장관과 법무부가 윤 총장 징계를 밀어붙이는 데 한층 부담을 안게 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본지 취재에 따르면, 이날 온라인으로 이뤄진 회의에는 총 125명의 법관 대표 중 120명이 참석했고 그중 18명이 ‘판사 문건’에 대한 입장 표명을 하자는 안건의 상정을 요구해 받아들여졌다. 법관대표회의의 한 관계자는 “원안이 제시된 후 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 자구(字句)를 수정한 6개의 수정안까지 포함해 모두 7개의 안(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모두 부결됐다”며 “장창국 제주지법 부장판사의 원안은 96(반대 82%)대 21(찬성18%)로 부결됐고 나머지 수정안도 비슷한 비율의 법관들이 반대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법관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면서 “대표 회의에서는 오늘의 토론과 결론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전했다.

7일 전국 각급 법원 대표 법관들의 모임인 ‘전국법관대표회의’가 화상으로 열리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사유인 판사 사찰 의혹에 대한 입장 표명 여부가 공식 안건으로 상정됐지만 전체 표결에서 부결됐다. /대법원

이날 표결은 찬반 토론을 거친 후 이뤄졌다. 찬성 입장에 선 판사들은 “검찰의 법관 정보 수집 주체(수사정보정책관실)가 부적절하며, ‘물의 야기 법관 리스트’ 기재와 같이 공판 절차와 무관하게 다른 절차에서 수집된 비공개 자료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법관의 신분상 독립을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낸 대다수 판사들은 “(윤석열 검찰총장 관련 사건이) 서울행정법원에서 재판이 계속 중이고 앞으로 추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해당 재판의 독립을 위해 전국법관대표회의 차원의 의견 표명은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전국법관대표회의 의결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고도 했다.

특히 서울행정법원에서 강한 반대 의견을 냈고 이는 많은 법관의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서울행정법원 판사들은 “입장을 바꿔 자기 법원에 관련 사건이 배당됐다고 생각해 보라”며 “어떤 식으로든 의견을 내는 것은 해당 법원에 큰 압력이 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당초 이 사안은 안건에 포함돼 있지도 않았다. 지난달 27일 제주지법 장창국 부장판사의 제안에 따라 일선 법원에서 안건 상정 여부를 논의했지만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날 오전 회의에서 장 부장판사가 다시 안건 제안을 했고 참석한 법관 대표 120명 중 18명의 찬성으로 안건으로 채택됐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집행부는 안건 상정 정족수(9명)를 넘겼기 때문에 ‘판사 문건’을 ‘법관의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 확보에 관한 의안’으로 상정했다. 이후 ‘판사 문건’에 대한 입장 표명 여부를 두고 찬반 토론이 진행됐다. 표결에 앞서 있었던 찬반 토론에서 ‘찬성’ 법관들이 강한 목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주도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재판 독립성을 위해 전국법관대표회의 차원의 의견 표명은 신중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이 다수 법관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이 안건은 결국 부결됐다. 이 과정에서 ‘찬성’ 법관들은 자구(字句)를 변경해 6차례 수정안까지 제시하며 통과를 시도했다. 수정안 중에는 ‘재판 중인 사안에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며 한발 물러서면서도 ‘법관 개인에 대한 정략적 비난 등에 반대한다’는 내용을 추가해 우회적으로 ‘판사 문건’을 비판하는 안(案)도 있었다. 하지만 한 참석자는 “어떤 내용이든 표결로 채택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어 모두 부결시킨 것 같다”고 했다.

이날 법관대표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판사 문건’이 정식 안건으로 상정됐다는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자 일선 법관은 당장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수원지법 지은희 판사는 이날 오후 법원 내부게시판에 “다수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안건 상정을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각급 법원 의견수렴 결과가 어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안이 거론된 배경은 무엇인지 보고 및 설명이 이뤄지는 게 대표권을 위임한 법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했다.

법원 관계자는 “여권이 부추겼던 의혹에 대해 정치 성향이 강한 일부 판사들이 전국법관대표회의 이름으로 공론화하려 했지만 대다수 법관들은 ‘휘말리지 않겠다’며 제동을 건 셈”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