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3년 6개월이 지났지만, ‘입법 공백’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낙태 비용 상승, 불법 약물 유통 등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 법안에 구멍이 생기면서 낙태 허용 기준 등을 놓고 의료계에서도 혼란을 겪고 있다.

사단법인 지평법정책연구소(이사장 이공현) 이춘희 선임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낙태 입법 공백 사태로) 그동안 음성적으로 이뤄져 온 임신중단 관련 의료광고 및 불법 약물이 온라인 등을 통해 유통되고, 의사가 낙태 시술을 거부하면 의료법상 진료 거부 행위로 처벌될 위험에 처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앞두고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시민단체 회원들과 낙태죄 합헌을 주장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헌재 “낙태죄 처벌 안 돼” 결정에도 국회 법 개정 안해

헌재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0년 말까지 법 개정을 하라고 요구했다. 헌법 불합치는 헌법에는 어긋나지만 바로 위헌 결정을 내릴 경우 생길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 한시적으로 법의 효력을 인정하는 위헌(違憲) 결정 방식이다. 헌재 결정에 따라 ‘낙태한 여성은 1년 이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269조는 2021년부터 효력을 상실한 상태다. 또 낙태를 도운 의사를 2년 이하 징역에 처하는 조항도 마찬가지다. 국회에선 형법과 모자보건법 등 관련법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개정 시한이 끝났다.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2021년부터는 임신 주차, 태아와 산모 상태, 임신 이유 등과 상관없이 모든 낙태 행위를 처벌할 수 없게 됐다. 예컨대 대법원은 지난해 3월 임신 34주차 태아를 낙태한 의사에 대해 살인 혐의는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낙태 혐의는 무죄를 확정했다. 이 의사는 태아를 제왕절개 방식으로 꺼낸 뒤 물 속에 담가 살해하고, 시신을 소각했다. 보통 36주 이상이면 정상적인 출산이 가능하다. 당시 태아도 울음을 터뜨리는 등 생존해 있었고 몸무게도 약 2.1kg에 달했다. 재판에서도 “34~36주차 태아의 생존률은 99%”라는 산부인과 전문의의 자문이 있었다. 그런데도 입법 공백 사태로 낙태 행위를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불법 약물 유통, 임신중절 비용 상승 등 부작용도

이춘희 연구원은 “현재 임신 중단이 전면 합법화된 것은 아니라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낙태한 여성 본인과 이를 도운 의사는 처벌할 수 없지만, 조산사 등 의사 외 직군이 낙태를 돕거나 낙태 과정에서 여성을 다치거나 죽게 하는 경우는 여전히 처벌된다. 이 때문에 ‘안전한 낙태’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이 연구원은 지적했다. 일부 병원이 임신중단 수술 비용을 기존보다 높여 받거나, 불법 약물을 유통해 수익을 내는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에는 정식 수입이 되지 않은 중국산 불법 낙태약 5만7000여정을 국내에 들여오고 이를 미국산으로 속여 판 일당이 붙잡히기도 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7년 기준 한 해에 약 5만건의 낙태 수술이 이뤄지고 있다고 추정했는데, 이중 상당수는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의료계 일각에선 “의사가 낙태 수술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게 돼 버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료법에 따르면 진료거부 행위를 한 의사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산모나 태아의 상태, 의사 개인의 상황 등에 따라 낙태 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조항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춘희 지평법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지평법정책연구소


◇법조계 “법 개정 통해 태아와 여성 건강 보호해야”

대다수 유럽 국가는 임신 기간과 사유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임신 중절을 비범죄화하고 있다. 영국은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24주 이내의 임신중단을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고, 미국은 태아가 독자적 생존능력을 갖추기 전의 일정한 시기에서 주(州)별로 요구하는 요건을 갖춘 낙태를 허용한다. 캐나다 등은 모든 형태의 임신중단 행위를 비범죄화하기도 했다.

이 연구원은 “(우리나라) 국회와 정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이며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입법개선 책임과 의무를 해태(懈怠)해 왔다”며 “서둘러 개선 입법을 마련해 태아와 여성의 생명과 신체, 건강을 실질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임신 주기별로 언제까지 낙태를 허용해야 하는지,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를 허용해야 하는지, 산모에게 숙고 기간을 얼만큼 줘야 하는지, 의사의 낙태 거부권을 인정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국회가 활발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원은 “공청회, 공론화위원회 등 관련 협의체를 구성해 조속히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면서 “정부제출안을 출발점에 놓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