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전경../뉴스1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추행’ 인정 범위가 대폭 확대될 수 있는 새 판결을 내렸다. 지금까지는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강제추행죄가 성립된다고 봤다. 그러나 새 판결은 그것보다 낮은 정도의 폭행·협박을 사용한 경우에도 강제추행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상대방이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신체 접촉이 모두 강제추행이 된다는 취지는 아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의 쟁점은 강제추행의 수단인 폭행·협박의 강도(强度)가 어느 정도가 돼야 하는지였다.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5조 2항에는 ‘친족 관계인 사람이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제추행한 경우에는 5년 이상 유기 징역에 처한다’고만 규정돼 있고 폭행·협박의 수위에 대해서는 기준을 두지 않고 있다. 형법 298조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만 담고 있다.

이에 따라 법원은 폭행·협박의 정도를 해석을 통해 정했다. 1983년 6월 2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지난 40년간 유지됐다. 이는 “강제추행죄에서 폭행·협박의 정도는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힘으로 상대방을 벽에 밀어붙인다거나 팔·다리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정도가 항거 곤란 수준의 폭행·협박으로 인정됐다.

이 사건의 피고인 A씨는 현역 군인이던 2014년 8월 사촌 여동생 B(당시 15세)양을 침대에 쓰러뜨리고 위에 올라탄 뒤 가슴을 만지고 이를 거부하며 밖으로 나가려는 B양을 따라가 끌어안은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1심인 보통군사법원은 “A씨가 B양에 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가해 추행 행위를 했다”면서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의 결론은 달랐다. 항소심은 “A씨가 B양을 침대에 눕히거나 끌어안는 행위 등을 할 때 B양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A씨의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심과 항소심은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라 ‘항거 곤란’ 기준을 적용하면서 사실관계에 대한 평가만 달리한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사건에서 강제추행 수단인 폭행·협박의 정의(定義) 자체를 변경했다. 이날 전원합의체에 참여한 총 13명의 대법관 중 12명은 다수 의견에서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일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해악을 고지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새 기준을 제시했다. 기존 판례보다 낮은 수준의 폭행·협박으로도 강제추행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이철원

다수 의견은 세 가지 근거로 기존 판례를 폐기했다. 우선 형법,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등의 강제추행 조항에서 폭행·협박의 정도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고 ‘강제(强制)’의 사전적 의미는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했다. 또 강제추행죄는 ‘성적(性的) 자기결정권’ 침해를 막기 위한 것으로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을 당했다면 그 수단인 폭행·협박이 반드시 항거 곤란 수준에 이를 필요는 없다고 봤다. 아울러 강제추행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행·협박에 저항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형평과 정의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이동원 대법관은 별개 의견에서 “강제추행죄에서 폭행·협박의 정도는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라야 한다는 기존 판례는 유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추행 관련 여러 법 조항이 기존 판례를 전제로 하고 있다”면서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는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은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폭행·협박이 상대방을 항거 곤란 상태에 빠뜨릴 정도가 아니라도 강제추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 상대방이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신체 접촉이 모두 강제추행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항거 곤란 수준의 폭행·협박이 없어도 강제추행이 인정될 수 있다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의미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