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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2심에서 ‘재판부쇼핑’이 논란이 됐습니다. 특정 재판부를 피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한 게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최 회장 측이 지난 9일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2명을 대리인단에 포함시키면서 불거졌습니다. 서울고법 민사 2부의 재판장인 김시철 부장판사의 조카가 김앤장 소속이어서 이 경우 재배당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됐습니다.
이 추가선임을 두고 노 관장 측 법률대리인은 “최 회장 측이 변론기일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김앤장을 선임해 재배당을 꾀하고 있다”며 “재벌의 금권을 앞세운 농단”이라고 입장을 냈습니다. 재벌가 이혼사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센 단어들입니다. 반면 최 회장 측은 “변론권 강화 차원으로 김앤장 변호사들을 추가선임한 것 뿐”이라며 “노 관장이 항소심에서 재판장과 매제가 대표 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 클라스를 대리인으로 선임해 재판부가 변경되는 등 재판부 쇼핑은 피고가 한 행동”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재판부 쇼핑 논란, ‘이 규정’이 문제였다
문제된 규정은 ‘대법원 공직자윤리위 권고의견 8호’ 입니다. 법관의 2촌 이내 친족이 특정 법무법인에 있을 경우 해당 법관이 그 법무법인의 사건을 사건을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3,4촌의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그 사건을 처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담당변호사가 아니면서 단지 고용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수임사건의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처리할 수도 있다’고 돼 있습니다. 사건처리의 공정성에 있어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가까운 친척이 근무하는 법무법인의 사건을 원칙적으로 맡지 않도록 하는 취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재판부의 판사 자녀가 A 법무법인에 근무하는데 A 법무법인 사건이 그 재판부에 배당되면 재배당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번처럼 ‘조카’에 해당하는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재배당을 요구할 수 있되 사안의 성격 등을 고려해 신축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판사와 친척관계에 있는 변호사의 소속 법무법인을 일부러 선임해 특정 판사 혹은 재판부를 피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재판부가 배당권자인 서울고법에 이런 사정을 알리고 재배당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재판은 재판부가 하지만 배당 권한은 법원장·수석부장판사 등 사법행정권자에게 있습니다. 보통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건 배당은 가사·의료·기업 등 전담 재판부에 기계적으로 배당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다만 이번 경우처럼 재배당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될 경우 재배당을 할 지, 어느 재판부로 할 지는 사법행정권자가 결정하게 됩니다.
법원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서울고법은 11일 “검토요청사유, 재판의 진행 경과 및 심리 정도 등을 종합해 재배당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재판장의 조카가 특정 법무법인 혹은 법률사무소 소속이라는 이유로 심리가 상당부분 진행된 사건의 재판부를 변경할 이유는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재판부 재판장의 조카는 해당 법률사무소에서 비교적 연차가 낮은 변호사로, 가사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판사 사촌’ 선임해 재판부 쇼핑? 논란의 ‘권고의견8호’
사실 ‘권고의견 8호’를 그대로 실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현재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변호사 숫자는 1000명이 넘습니다. 법무법인 광장, 태평양도 각각 500명이 넘는 변호사들이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부 판사 중 어느 한 명이 이들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와 3촌, 4촌이라는 이유로 사건을 재배당해야 한다면 자칫 재판부 쇼핑을 조장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이 한참 진행된 후에도 재판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 예상되면 판사와 4촌관계인 변호사가 있는 법무법인의 변호사를 선임해 판결을 피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논란이 최 회장 측이 추가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불거졌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재판부가 법원에 재배당 사유 해당 여부에 대한 ‘의견 요청’을 한 것이어서 최 회장 측이 재판부 쇼핑을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법원 결정에 대해 최 회장 측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조치”란 입장을 내놨습니다. 원래부터 재판부 변경 의도를 갖고 한 추가선임도 아닌데 괜히 노 관장 측으로부터 그런 의도로 의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노 관장 측에서도 뭔가 추가입장을 내놓을 것도 같지만, 양측의 싸움이 끝이 없을 듯해 지상 중계는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권고의견 8호’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려는 좋은 취지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규정을 형식적·기계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오히려 악용사례가 생길 수 있고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법원의 결정은 규정의 문언에 집착하지 않은, 상식에 기반한 결정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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