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은 14일 ‘용인 경전철’ 재판에서 이정문 전(前) 용인시장, 한국교통연구원과 소속 연구원 3명에게 총 214억여 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법조계에서는 “지자체장이 세금을 마음대로 썼다가는 퇴임한 뒤까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판결”이라는 말이 나왔다. 법원은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한 지자체장뿐 아니라, 잘못된 수요 예측을 한 연구 기관에도 책임을 물었다. 또 경제 능력에 상관없이 엄격하게 법리에 따라 배상액을 부담시켰다.
◇법원 “前 용인시장, 중대한 과실”
재판부는 용인시가 2004년 경전철 시공사인 캐나다 봄바디어 컨소시엄에 수요 예측치의 90%를 최소 수입으로 보장하는 사업 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이 전 시장의 ‘중대한 과실(過失)’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수입이 예측치의 90%에 미달하면 그 부족분을 지자체 재정으로 민간 업자에 메워주는 협약인데도, 이 전 시장이 타당성 검토를 제대로 안 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전 시장은 기획예산처가 ‘민간 사업자에 30년간 90% 운영 수입 보장’ 조건은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이를 반영하지 않았고, 운영 수입이 일정 수준에 미달하면 수입을 보장하지 않는 ‘저지 규정’도 두지 않았다”고 했다.
또 재판부는 교통연구원과 소속 연구원들에게도 “수요 예측에 합리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과도한 수요 예측을 했다”면서 “경전철 개통 후 실제 탑승 인원은 예상치의 5~13%에 불과했다”고 했다.
재판부는 용인시가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민간 사업자에 이미 지급한 4293억원을 손해액으로 판단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시장, 교통연구원 소속 연구원들은 5%의 책임을 져야 한다며 배상금을 214억여원으로 산정했다. 그러면서 214억여원 중 교통연구원 자체의 책임분은 42억9300만원(손해액의 1%)으로 한정했다.
이날 재판부는 이 전 시장 등 책임져야 할 대상들이 ‘부진정 연대 채무’ 관계에 있다고 봤다. 향후 재판에서 배상금이 확정되면 용인시가 각자에게 전액을 청구할 수도 있고 분할 청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2013년 10월 주민 소송이 제기된 이후 10년 4개월 만에 나왔다. 주민소송단 측은 “(전직) 시장과 연구원 등에 대한 중과실 책임이 인정된 게 이번 판결의 의미”라고 했다. 앞서 1·2심은 ‘주민 소송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대법원이 지자체의 민간 투자 사업 실패도 소송 대상이 된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자체장이 정책을 결정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들을 무시하고 재정을 낭비한 것에 책임을 지도록 한 판결”이라고 했다. 한 변호사는 “지자체장이 치적 쌓기용으로 경제성 검토나 수요 조사를 제대로 안 하면 퇴임 후에도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법원이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유사 소송 줄 이을 가능성”
이번 판결로 다른 지자체가 막대한 세금을 들여 추진한 민간 투자 사업에 대해서도 유사 소송이 잇따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총사업비 6767억원이 투입된 의정부 경전철은 민간 업자가 30년간 운영하는 조건으로 2012년 7월 개통했지만, 실제 승객 수요는 예상치의 15% 정도에 그쳤다. 적자가 쌓인 민간 업자가 2017년 파산했지만, 의정부시는 소송 끝에 이 업자에 1720억원을 지급했다. 2018년 12월 새 민간 사업자가 선정됐는데, 의정부시는 이 사업자에도 매년 60억~100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인천의 도심형 관광 모노레일인 ‘월미바다열차’도 2019년 개통 이후 누적 적자가 292억원에 달한다. 월미바다열차는 인천시가 853억원을 투입해 2010년 준공했다가 시험 운행 중 부실 공사가 드러나 전면 운행 중단했던 ‘월미은하레일’에 2018년 183억원을 추가 투입해 개통한 것이다.
지난 2011년 개통한 부산김해경전철도 적자를 메우기 위해 매년 세금 수백억 원이 투입되고 있다. 경남 김해시와 부산시는 지난해 경전철 적자 보전 비용으로 각각 505억원과 293억원을 투입했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누적 지원금은 각각 4662억원, 2715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