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의 판사가 재판 도중 바뀌면 앞선 재판 내용을 파악하는 공판 갱신 절차가 간소하게 바뀐다. ‘재판 지연’을 방지하기 위해, 판사가 기존의 증인 신문 녹음 파일 등을 법정에서 다시 틀지 않고 서류 조사로 대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검사나 피고인이 사건과 관련이 없거나 재판을 부당하게 지연할 증거를 신청하면 법원이 바로 기각할 수 있는 규정도 새로 만들었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전날 조희대 대법원장 등 대법관 전원이 참석한 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형사소송규칙 일부 개정안을 의결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하고 핵심 증거 위주로 신속하게 재판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은 15일 이내에 관보에 게재되면 효력이 즉시 발생하고, 기존에 재판이 진행되는 사건에도 적용된다. 이번에 재판장 교체로 갱신 절차를 밟아야 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장동·위례·성남FC·백현동’ 사건도 적용 대상이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재판의 갱신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144조다. 기존에는 재판부가 변경되면 바뀌기 전에 재판한 증인 신문 내용과 증거 서류 등을 다시 조사하라고 돼 있었다. 통상 피고인의 동의를 얻어 재판부가 구두로 갱신하는 약식 절차로 진행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은 피고인이 “새 재판부가 원칙대로 증인 신문 녹취록을 다 들어달라”고 요구하면 문제가 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행정권 남용’ 1심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 재판부가 2021년 2월 교체된 후 기존에 조사된 증인 진술 녹취 파일을 재생하는 데만 7개월이 걸렸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등 대장동 민간 업자들의 1심 재판도 2023년 2월 재판부 교체로 증거 녹음 파일을 일일이 재생하느라 두 달 가까이 지연됐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개정된 형사소송규칙 144조에는 “녹음물에 대한 녹취서를 재판장의 고지 등 방식으로 증거 조사를 갈음할 수 있다”는 단서가 추가됐다. 새로 온 재판부가 기존 녹음 파일을 하나하나 듣지 않고 녹취서를 낭독하거나 고지해 갱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쟁점이 방대하고 증인이 많은 형사 사건은 재판부가 교체될 때마다 갱신 절차가 문제 됐는데, 이번 개정으로 재판 지연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예컨대 이재명 대표의 대장동 재판은 지금까지 69차례 공판이 진행됐고 증거 기록만 20만쪽이 넘는데, 이 재판을 녹음 파일을 다시 트는 방식으로 조사하면 갱신 절차에만 몇 개월이 걸린다. 이런 불필요한 논란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은 또 검사와 피고인들의 불필요한 증거 신청을 받아주지 않을 수 있는 근거 규정도 신설했다. 규칙 132조 단서에 “검사, 피고인 또는 변호인은 증명에 관련되고 필요한 증거만을 선별해 신청해야 한다”, “법원은 이를 위반하거나 재판에 부당한 지연을 초래하는 증거 신청을 기각할 수 있다”고 추가한 것이다.
정치인 재판이나 간첩 사건에는 검찰이 증거로 신청하는 조서나 서류가 많은데, 피고인들이 이에 부동의하면 관련 증인을 일일이 불러야 해 재판이 늦어진다. 이 대표가 관련된 수원지법 성남지원의 ‘성남FC 불법 후원금’ 사건 재판에서 검찰은 증인으로 410명을 신청했다. 성남FC에 불법 후원금을 준 혐의로 기소된 전직 기업 임원들이 증거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자, 검찰이 신빙성을 입증하겠다며 관련 증인을 대거 신청한 것이다.
반대로 피고인이 재판 지연을 위해 무더기로 증거 신청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새 개정안에 따라 법원은 이런 증거 신청들을 모두 기각할 수 있게 됐다.
한 부장판사는 “최근 형사 사건들은 기록이 너무 방대하고 진행 절차도 복잡해서 판사가 1~2년씩 열심히 재판해도 판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규칙이 효율적으로 바뀌어 재판이 한결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재판 지연’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강조해온 조희대 대법원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