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녹음파일의 원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증거 능력을 무조건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본 파일의 검증 결과와 법정 진술, 수사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원본과의 동일성을 따져봐야 한다는 취지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와 B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B씨는 2018년 주식 투자 등 명목으로 피해자 C씨를 속여 2억7000만원을 가로챘다. B씨는 C씨에게 3000만원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았는데도 못 받았다며 무고한 혐의도 받았다.
재판에서는 피해자 C씨가 제출한 녹음파일을 증거로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녹음파일에는 C씨가 피고인들에게 주식 투자를 권유 받고, 돈을 건넨 상황 등 핵심적인 내용이 담겼으나 원본이 아니었다. C씨는 휴대전화로 대화를 녹음하고 이를 컴퓨터나 외장 하드디스크 등에 옮겨놓은 뒤 휴대전화에 있는 원본은 대부분 삭제했다. 수사를 받을 때는 CD에 파일을 복사해 제출했다.
복제·위조가 가능한 디지털 파일은 원본이 없을 경우 증거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까다로운데, 하급심 판단은 엇갈렸다. 1심 재판부는 녹음파일을 증거로 인정해 A씨에게 징역 2년 6개월, B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녹음파일 일부와 C씨의 진술이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반면 2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핵심 증거인 사본 녹음파일이 “복사 과정에서 편집되는 등 원본 내용 그대로 복사된 것이라는 점에 대한 입증이 없다”고 봤다. 2심 재판부는 또 현금이 오간 일시·장소에 피고인들이 없었다는 알리바이 일부를 인정했고,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판결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C씨가 녹음파일을 인위적으로 편집·조작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일관되게 진술했고, 일부 파일의 감정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피해자의 의도나 특정한 기술에 따라 그 녹음이나 복사 과정에서 이 사건 녹음 파일의 내용이 편집·조작됐다고 의심할 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사인(私人)이 복사한 사본을 증거로 제출한 경우, 원본과 사본을 직접 비교할 수 없는 때에는 녹음파일에 관여한 사람의 증언이나 진술, 녹음파일에 대한 검증·감정 결과, 수사 및 공판 심리의 경과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사본의 원본 동일성 증명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기존 판례를 인용했다.
이어 “원심은 녹음파일의 원본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 들어 원본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증거능력을 부정해 그 내용을 심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